정부가 지난해 한·미 관세 협상의 핵심 합의 사항이었던 대미(對美) 전략투자의 첫 자금 집행을 마쳤음에도, 통상 환경을 둘러싼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양국 간 공식 합의 문서에 명시되지 않은 대규모 에너지 프로젝트 투자를 일방적으로 기정사실화하고 있어서다. 여기에 미국 무역대표부(USTR)가 수주 내로 글로벌 공급과잉 문제와 관련한 무역법 301조 조사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자칫 한국이 대규모 투자의 반대급부로 어렵게 확보했던 ‘15% 관세 상한’ 조건이 유지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가 나온다.
텍사스 발전소에 24억달러 첫 송금
5일 관계부처에 따르면 정부는 최근 대미 전략투자 1호 사업으로 확정된 ‘프로젝트 스타’를 위해 24억 달러(약 3조 2600억 원)의 자금의 대미 송금을 완료했다. 이 사업은 미국 텍사스 라살 카운티 엔시날 지역에 6.4기가와트(GW) 규모의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용 가스복합화력발전소를 건설하는 대규모 인프라 프로젝트다. 이번 3조 원대 자금 집행은 지난해 한미 간 치열하게 전개됐던 관세 협상의 결과물을 이행하는 첫 실질적 조치다.
한국은 지난해 대미 관세협상 국면에서 일본, 유럽연합(EU) 등 주요 경쟁국들에 비해 ‘불리하지 않은 무역 조건’을 확보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3500억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를 약속하면서 미국 측이 부과하려던 25%의 상호관세를 15% 수준으로 낮추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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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공개된 대미투자는 미국의 인프라 프로젝트에 투자하는 ‘산업동맹’으로서의 의미가 크다는 평가가 나온다. 엔시날 프로젝트 외 원전 분야에서는 한국형 APR1400 2기와 AP1000 6기 등 총 8기 건설을 위한 양국 간 협력 틀(프레임워크)을 마련했고, 천문학적 비용이 투입되는 알래스카 액화천연가스(LNG) 프로젝트의 경우 상업성과 사업구조 등을 ‘추가 검토’하기로 하는 선에서 합의점을 찾았다.
트럼프 대통령의 일방적 발표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추가 청구서’ 압박도 거세지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한국이 미국 에너지 사업에 최대 2000억 달러를 투자할 계획이고, 이 가운데 500억달러가 알래스카 LNG 프로젝트에 투입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우리 정부가 “확정되지 않은 사안”이라고 즉각 반박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1일 자신의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을 통해 “한국과의 협상에 84억 달러 규모의 석유회수증진(EOR) 프로젝트가 포함됐다”고 재차 주장했다.
이 역시 우리 정부는 ‘합의한 바 없다’는 입장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일(현지시간)에는 백악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한국의 알래스카 LNG 투자 여부를 묻는 질문에 “내가 성급하게 발표한 것은 아니다”라며 “한국이 해당 사업 투자를 원하지 않는다면 나로서는 괜찮다. 그들에게 더 많이 부과(청구)하면 된다. 곧 합의하지 않으면 두 배로 올릴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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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이 같은 행보를 그의 저서 ‘거래의 기술’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협상 전략으로 분석한다. 아직 합의되지 않은 사안의 규모를 과장해 언론과 대중에게 먼저 알림으로써 상대방의 양보를 강요하는 방식이다. 이는 아울러 다가오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핵심 격전지인 알래스카 등에서 공화당의 승리를 이끌기 위한 정치적 선거 전략이라는 평가도 지배적이다. 동맹국으로부터 대규모 투자를 끌어냈다는 가시적인 성과를 유권자들에게 과시하려는 목적이 깔려 있기 때문에, 선거 전까지는 이런 과시적 발표가 이어질 수 있다는 관측이다.
임박한 USTR 301조 결과 발표
미국 통상당국인 무역대표부(USTR)의 조치도 가시화하고 있다. 제이미슨 그리어 USTR 대표는 지난 2일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글로벌 과잉생산 문제에 대해 “입 다물고 수용할 생각은 없다”며 “향후 수주 내에 과잉생산 문제에 관한 우리들의 조사에 대해 공표하겠다”고 밝혔다. 다분히 중국을 겨냥한 성격이 강하지만, 그 불똥이 한국으로 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분석이다.
미국 행정부는 무역법 301조를 기존 상호관세를 대체할 새로운 통상 무기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 지난 2월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에 근거한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조치가 미 연방대법원으로부터 위법 판단을 받자, 미국은 무역법 122조와 301조 등을 동원해 관세 부과 수단을 재정비하는 중이다. 301조는 ‘외국 정부의 부당·불합리·차별적 조치가 미국 무역에 부담을 주거나 제한한다’고 판단될 경우 USTR이 조사와 협의를 거쳐 관세 등 보복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한 강력한 규정이다.
미국은 지난 3월 중국과 한국, 일본, EU 등 16개 경제권을 대상으로 제조업 구조적 공급과잉 및 과잉생산에 대한 301조 조사를 시작했다. 이미 한국은 앞서 진행된 강제노동 문제 관련 301조 조사(60개 경제권 대상) 결과에 따라, 7월 24일부터 일본·스위스와 함께 12.5%의 추가 관세를 적용받고 있다. 앞으로 수주 내 공급과잉 관련 301조 조사 결과가 발표되면 추가 관세가 덧붙여질 수 있다.
정부 "문서 합의가 최우선"
정부의 핵심 목표는 지난해 관세 협상에서 대규모 투자를 약속하고 확보한 ‘15% 관세 수준’이 301조 등 어떠한 추가 통상 조치 하에서도 상한선으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은 지난달 22일 대미투자 관련 백브리핑에서 “미국 측이 어떤 형태의 조치가 있더라도 관세율을 15% 수준에서 유지하겠다는 입장을 밝혀왔다”고 설명했지만, 이후 발표된 공동 팩트시트 등에는 명문화된 조항이 없다. 그리어 USTR 대표는 최근 주요 20개국(G20) 통상장관회의에서 “무역협정에서 합의한 관세 상한을 고려하겠다”는 입장을 내비치기도 했다.
정부는 공식 합의 문서에 따른 원칙적이고 차분한 대응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산업부는 전략투자와 관련해 양국 간 합의된 사안은 팩트시트와 공식 보도자료에 명시된 3대 프로젝트 외에는 없다고 밝히고 있다. 김정관 산업부 장관은 최근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에게 미국 측의 연이은 일방적 발표가 양국 간 실제 협의 내용을 앞서 나갔다는 취지로 “항의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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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우선 트럼프 대통령의 변칙적인 언사에 일일이 대응할 필요는 없다고 지적한다. 가장 중요한 기준은 말이 아니라 양국이 합의해 문서화한 내용이라는 점에서다. 향후 미국의 추가 투자 압박도 ‘상업적 타당성’을 근거로 철저히 검증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 장관은 “대미 전략투자를 어떻게 이행하는지 ‘사후관리’가 더욱 중요해진 시점”이라고 밝혔다.
박종관/김대훈 기자 daep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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