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국채금리는 고공행진하고 있고, 인플레이션도 좀처럼 잡히지 않고 있습니다. 금리 상승으로 대출 이자 부담은 커지고, 인플레이션으로 장바구니 물가도 오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미국인들의 소비는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미국 경제의 가장 큰 엔진인 소비가 여전히 돌아가면서 성장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1. 살아 있는 소비 지표
가장 최근 공식 지표인 미국의 8월 개인소비지출은 전월보다 0.9% 늘었습니다. 같은 기간 개인소득은 0.3% 증가하는 데 그쳤지만, 소비는 소득 증가율의 세 배 속도로 늘었습니다. 저축을 줄이면서라도 지갑을 연 셈입니다.ADVERTISEMENT
8월 소매판매도 전월보다 1.2% 증가해 시장 예상치를 웃돌았습니다. 고금리와 고물가에도 미국 소비가 예상보다 강하다는 신호입니다.
2. 소비의 이동
고물가·고금리 환경에서도 미국 소비자가 지갑을 완전히 닫지는 않았다는 뜻입니다. 다만 소비의 장소와 방식이 달라졌습니다.고소득층은 주가 상승에 따른 자산효과를 바탕으로 소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반면 중·저소득층은 소비 자체를 크게 줄이기보다 백화점에서 할인점으로, 정가 매장에서 오프프라이스 매장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같은 물건이라도 더 합리적인 가격에 사려는 소비가 늘어난 것입니다.
3. 명품 시장의 둔화
LVMH의 2026년 상반기 매출은 386억유로로, 유기적 성장률 기준 2% 증가에 그쳤습니다. 2023년 상반기 17% 성장과 비교하면 성장세가 크게 둔화한 것입니다. 환율 영향을 반영한 보고 기준으로는 매출이 오히려 3% 감소했습니다.ADVERTISEMENT
수익성도 나빠졌습니다. 2026년 상반기 경상영업이익은 87억유로로 1년 전보다 4% 감소했습니다. 핵심 사업인 패션·가죽 부문 매출은 상반기 보고 기준 5% 줄었습니다. 다만 2026년 2분기에는 유기적 성장률 기준 1% 증가로 돌아선 점이 그나마 위안거리입니다.
케링도 구찌 부진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2026년 상반기 그룹 전체 매출은 72억2000만유로로, 보고 기준으로는 3% 감소했지만 비교 기준으로는 1% 증가했습니다. 구찌의 상반기 매출은 27억5700만유로로, 비교 기준 5% 감소했습니다. 다만 2분기 감소 폭은 비교 기준 2%로 줄어들며 회복 조짐을 보였습니다.
에르메스는 2026년 상반기 매출이 81억6300만유로로, 환율 변동을 제외하면 6.1% 성장하며 상대적으로 선방했습니다. 다만 보고 기준 성장률은 1.6%였습니다. 2023년 연간 21%, 2024년 연간 15% 성장과 비교하면 성장 속도는 느려진 모습입니다.
4. 할인점은 상승 추세
반면 할인 유통업체들의 실적은 강세를 보이고 있습니다.TJ맥스는 올해 2분기, 8월 1일 마감 기준 매출이 152억달러로 전년 동기보다 5% 늘었습니다. 동일점포 매출은 4% 증가했고, 조정 주당순이익은 1.22달러로 11% 늘었습니다. 회사는 연간 전망도 상향 조정했습니다.
ADVERTISEMENT
로스는 2분기 매출이 13.3% 증가했고, 동일점포 매출은 10% 뛰었습니다. 벌링턴도 매출이 11% 늘어난 데 힘입어 연간 전망을 올렸습니다.
코스트코의 4분기 매출은 11.2% 증가했고, 월마트 매출도 5.9% 늘었습니다. 소비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가격 경쟁력이 높은 유통업체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5. 미국 오프프라이스 매장의 경쟁력
미국 오프프라이스 매장의 경쟁력은 단순히 싸게 파는 기술에만 있지 않습니다. 세계 최대 소비시장이 만들어내는 막대한 재고와, 남은 재고를 끝까지 현금화할 수 있는 유통 구조가 결합한 결과입니다.ADVERTISEMENT
우선 미국은 전 세계 소비재 물량을 빨아들이는 시장입니다. 구매력 있는 소비자가 3억 명 이상 모여 있고, 의류·신발·화장품·생활용품을 대량으로 소비합니다. 글로벌 브랜드가 미국 시장을 놓고는 규모의 경제를 만들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백화점과 브랜드 직영점, 대형마트, 아울렛, 온라인몰에 동시에 대규모 물량을 공급하는 배경이기도 합니다.
미국은 백투스쿨, 블랙프라이데이, 연말 쇼핑 시즌처럼 특정 시기에 수요가 폭발하는 시장이기도 합니다. 인기 상품이 없으면 그날 매출만 잃는 것이 아닙니다. 소비자가 경쟁 브랜드로 이동할 수 있고, 유통업체도 다음 시즌 주문을 줄일 수 있습니다. 이에 따라 브랜드와 유통업체는 수요 예측보다 넉넉하게 물량을 확보하는 쪽을 택합니다.
ADVERTISEMENT
전국 물류망과 대형 창고, 온라인 판매망이 촘촘하다는 점도 이들의 강점입니다. 한 지역에서 팔리지 않는 상품을 다른 지역이나 온라인으로 돌릴 수 있습니다. 정가 매장 판매가 기대에 미치지 못해도 백화점 세일, 브랜드 아울렛, 온라인 할인, 마켓플레이스, 오프프라이스 매장까지 여러 단계의 판매 출구가 있습니다. 재고를 한 번에 폐기하지 않고, 판매 채널을 옮기며 가격을 낮춰 끝까지 현금화하는 구조입니다.
날씨가 예상과 다르거나 유행이 바뀌고, 경기가 조금만 둔화해도 과잉 생산분과 주문 취소분, 시즌 잔여 재고가 쌓입니다. 국토가 넓어 지역별 기후가 크게 다르고, 소비자의 취향과 인종 구성도 다양하다는 점 역시 일부 지역이나 상품군에서 남는 재고가 생기는 배경이 됩니다.
오프프라이스 업체들은 재고를 단순 처분품처럼 보이지 않게 파는 데도 능합니다. 매주 다른 브랜드와 상품을 들여오고, 같은 상품을 오래 진열하지 않습니다. 소비자는 ‘이번에 사지 않으면 다시 못 볼 수 있다’는 생각으로 매장을 자주 찾습니다. 백화점에서 팔아도 어색하지 않은 브랜드 상품을 예상보다 낮은 가격에 발견하는 이른바 ‘득템’ 경험이 반복 구매로 이어집니다.
인플레이션기에는 이 구조가 더 강해집니다. 소비자들은 무조건 가장 싼 물건만 찾는 것이 아닙니다. 생활비 부담이 커진 만큼 의류·가방·화장품·집 꾸미기 분야에서는 브랜드와 품질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지출을 줄이려 합니다. 미국의 오프프라이스 매장은 거대한 소비시장이 남긴 괜찮은 상품을 합리적인 가격에 살 수 있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6. 코스트코와 월마트의 경쟁력
식품 비중이 큰 코스트코와 월마트 역시 저가 소비를 떠받치는 핵심 축입니다.코스트코의 경쟁력은 선택지를 줄이는 데서 나옵니다. 품목 수는 약 4,000개로 일반 유통업체의 10분의 1 수준입니다. 품목이 적은 만큼 대량 매입을 통한 협상력이 커지고, 재고 회전도 빨라집니다.
코스트코는 상품 마진을 10~14% 수준으로 낮게 유지합니다. 대신 2025 회계연도에만 멤버십 회비로 53억달러를 벌었습니다. 영업이익의 절반가량이 회비에서 나옵니다. 자체 브랜드인 커클랜드의 2025 회계연도 매출은 약 900억달러로, 코카콜라나 P&G를 웃도는 규모입니다.
월마트는 규모 자체가 경쟁력입니다. 연 매출이 7000억달러를 넘는 세계 최대 소매업체입니다. 미국 식료품 시장의 20~30%를 차지하고, 미국 내 4600개 이상의 매장이 사실상 거대한 물류망 역할을 합니다. 온라인 식료품 시장에서도 30%대 점유율로 1위를 지키고 있습니다.
월마트는 ‘매일저가’, 즉 EDLP 전략을 통해 세일이 없어도 싸다는 인식을 심었습니다. 식료품이 미국 매출의 약 60%를 차지하기 때문에 경기가 나빠져도 소비자의 발길이 쉽게 끊기지 않습니다.
7. 소비에 유리한 제도
미국은 소비를 유지하기 쉬운 제도적 환경도 갖추고 있습니다.우선 연방 차원의 부가가치세, 즉 VAT가 없습니다. OECD 국가 가운데 유일합니다. 미국의 소비세 수입이 전체 세수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8%로 OECD 평균인 21.4%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주택금융 구조도 다릅니다. 미국에서는 패니메이와 프레디맥이 뒷받침하는 30년 고정금리 모기지가 널리 보급돼 있습니다. 금리가 올라도 기존 차주의 월 상환액은 대체로 변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금리가 내려가면 중도상환수수료 부담 없이 차환하기도 비교적 쉽습니다.
모기지 이자 공제 제도도 있습니다. 주택 구매를 위해 낸 이자 일부를 세금에서 공제해주는 방식입니다. 또 파산 제도는 채무자에게 비교적 관대한 편입니다. 챕터7 파산은 일정 요건을 충족하면 무담보 채무를 비교적 빠르게 면책받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도록 합니다.
8. 사회적 분위기도 한몫
제도만큼 중요한 것은 사회적 분위기입니다. 미국에서는 빚을 지는 일이나 파산에 대한 사회적 낙인이 상대적으로 약한 편입니다. 챕터7 파산을 통해 빚을 정리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2008년 금융위기 당시에는 집값이 크게 하락하면서 ‘전략적 디폴트’가 공개적으로 논의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5년 전 50만달러짜리 집을 샀고, 대출이 45만달러 남아 있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그런데 집값이 폭락해 지금 팔아도 30만달러밖에 받지 못한다면, 집값보다 빚이 15만달러 더 많은 이른바 ‘깡통주택’이 됩니다.
매달 모기지를 갚을 능력이 있어도, 30만달러짜리 집을 위해 45만달러의 빚을 갚아야 하는 상황입니다. 일부 차주는 신용등급 하락을 감수하더라도 집을 은행에 넘기고 새로 시작하는 편이 경제적으로 더 낫지 않겠느냐고 판단했습니다. 물론 모든 차주에게 가능한 선택은 아니지만, 당시 미국 사회에서 실제로 논의됐던 현상입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본토 전체가 파괴되는 전쟁을 겪지 않았습니다. 유럽·일본·한국처럼 전쟁과 극심한 빈곤을 집단적으로 경험한 사회와 비교하면, 저축과 절약에 대한 강박이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분석도 나옵니다.
또 경기둔화 국면은 있었지만 주가와 집값이 장기적으로 상승하는 모습을 경험한 세대가 많습니다. 자산은 결국 다시 오른다는 믿음, 그리고 쓰고도 남을 수 있다는 기대가 소비에 대한 경계심을 낮춘 측면이 있습니다.
9. 주가 상승의 자산효과
2026년 증시 강세는 가계 자산을 늘렸고, 이는 특히 고소득층의 소비 여력으로 이어졌습니다.JP모건체이스 연구소가 9월 발표한 보고서는 이를 숫자로 보여줍니다. 2015년부터 2000만 개 계좌를 추적한 결과, 투자계좌에서 돈을 인출해 소비하는 사람의 비중은 2.4%에서 8.2%로 세 배 이상 늘었습니다. 이 자금이 전체 소비의 6.8%를 떠받치고 있다는 분석입니다.
무디스에 따르면 상위 10% 소득층이 전체 소비의 45.5%를 차지합니다. UCLA 앤더슨 전망도 9월 보고서에서 AI 투자 확대와 주가 상승에 따른 자산효과가 미국 GDP 성장률의 약 1%포인트를 설명한다고 분석했습니다.
10. 소비가 미국 경제를 떠받칩니다
미국 GDP에서 개인소비지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70%입니다. 소비가 멈추지 않는 한 미국 경제도 쉽게 꺾이기 어렵습니다.미국의 2분기 실질 GDP 성장률은 연율 2.2%로, 앞선 추정치인 1.5%에서 상향 조정됐습니다. 성장의 가장 큰 버팀목은 소비였습니다. 같은 기간 개인소비지출은 연율 3.8% 증가했습니다. 1분기 0.7% 증가에 그쳤던 소비가 크게 반등하면서 기업 투자와 함께 경제성장을 떠받쳤습니다.
소비가 살아 있으면 기업은 물건을 팔고 재고를 줄일 수 있습니다. 신규 주문과 고용도 쉽게 끊지 않습니다. 소비가 할인점으로 이동하든, 고소득층이 주가 상승에 힘입어 여행과 서비스를 더 소비하든, 지출 자체가 이어지는 한 미국 경제의 성장 엔진은 계속 돌아갈 수 있습니다.
뉴욕=박신영 특파원 nyus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