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찾은 서울 마곡 이랜드 본사, 지하로 내려가자 언뜻 대형 아울렛처럼 보이는 거대한 의류 진열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곳은 이랜드가 운영하는 ‘패션연구소’로, 이 회사 사람들은 이 공간을 ‘수집가의 옷장’이라고도 부른다. 사실 옷장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방대하고, 창고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섬세하다. 1990년대부터 세계 각지에서 모은 옷을 전시해둔 것이 어느새 약 29만 점이 됐다. 패션 전문 서적도 2만6000여 권에 이른다. 디자이너들은 세밀하게 구분된 각 섹션을 오가며 마치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듯 필요한 옷을 대여해 갔다. 인공지능(AI)으로 몇 초 만에 수백 개의 패션 시안을 뽑아낼 수 있는 시대, 이 회사는 왜 이렇게까지 ‘비효율적’인 공간을 만들었을까.
그들이 ‘행어링’을 하는 이유

패션연구소가 소장한 의류는 품목별로 바시티 재킷 약 900점, 체크 아이템 8300여 점, 스웨트셔츠 약 8000점, 넥타이 3만 점이다. 그 외에 드레스, 구두 등도 시대와 디자인별로 세밀히 구분해 놨다. 숫자만 보면 그저 거대한 빈티지 컬렉션 같지만 이곳의 옷은 감상용 소장품과는 조금 다르게 쓰인다. 새로운 시즌을 준비하는 이랜드 소속 디자이너들은 상품 출시 1년 전부터 비슷한 종류의 옷을 수십 벌씩 꺼내 나란히 놓고 비교하는 ‘행어링’ 작업을 한다. 원단의 조직과 두께부터 봉제 방식, 지퍼와 단추, 그래픽 위치까지 살핀다. 오래된 옷을 그대로 복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같은 아이템이 수십 년 동안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보기 위해서다.
오래된 바시티 재킷 한 벌은 빈티지지만, 서로 다른 시기에 제작된 바시티 재킷 100벌을 연도순으로 늘어놓으면 일종의 시계열 데이터가 된다. 최근 Y2K에 이어 2010년대 스타일까지 다시 소환될 만큼 유행의 회귀 속도가 빨라지면서 이런 자료의 활용도도 커지고 있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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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들은 연구소가 보유한 1980년대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의 실제 바시티 재킷을 꺼내 소재와 패턴, 그래픽 배치를 비교했다. 스파오의 케이블 스웨터를 개발할 때도 아일랜드 아란제도 어부들의 스웨터에서 유래한 전통적인 케이블 패턴을 참고하되 요즘 취향에 맞는 자수와 디자인을 더했다.
패션업계에서 과거를 들여다보는 일은 새롭지 않다. 막스마라의 이탈리아 기업 아카이브 BAI에는 원본 스케치와 패턴, 직물 등이 30만 점 이상 보관돼 있다. 페라가모도 피렌체의 박물관과 아카이브에 신발뿐 아니라 초기 제작 도구와 디자인 자료를 보존하고 있다. 다만 이런 럭셔리 하우스의 아카이브가 자사 역사를 축적하는 ‘헤리티지 아카이브’에 가깝다면, 이랜드는 여러 시대와 국가에서 수집한 옷을 실제 상품 개발에 사용하는 ‘리서치 아카이브’ 성격이 강하다.
AI가 알려주지 않는 것
흥미로운 것은 패션산업이 그 어느 때보다 디지털화된 지금도 이런 실물 자료의 필요성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SNS와 온라인 빈티지숍에는 과거 패션 이미지가 넘쳐나고, AI는 특정 시대와 스타일을 조합한 이미지를 몇 초 만에 뚝딱 생성한다. 하지만 오래된 재킷 한 벌이 얼마나 무거운지, 가죽이 시간이 지나며 어느 부분부터 갈라지는지는 사진만으로 확인하기 어렵다. 봉제선을 뒤집어봐야 알 수 있는 정보도 있다. 오래된 데님이 어느 부분부터 닳았고, 니트가 어느 방향으로 늘어났는지에는 시간이 옷에 남긴 흔적까지 담겨 있다.ADVERTISEMENT
최근 유행의 주기가 짧아지고 여러 시대의 스타일이 동시에 소환되면서 과거 실물을 체계적으로 모아놓은 아카이브의 가치는 더욱 올라가고 있다는 설명이다. 다음 시즌에 팔릴 옷을 만들기 위해 누군가는 오늘도 수십 년 전 옷의 지퍼를 열고 봉제선을 뒤집어본다. 이랜드는 마곡 글로벌 연구개발(R&D)센터 이전에 맞춰 의류 아카이브를 35만 점까지 늘릴 계획이다.
정소람/안혜원 기자 ra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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