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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개월 안개 속 협상 마침표…'미국서 버는 돈'으로 증명해야 [여기는 논설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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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개월 안개 속 협상 마침표…'미국서 버는 돈'으로 증명해야 [여기는 논설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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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개가 쌓여 있을 때는 안개 위로 올라가야 한다.”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은 지난달 대미 투자협상 결과를 브리핑하면서 그림 한 장을 꺼내며 이같이 말했다. 짙은 안개가 산과 계곡을 삼킨 가운데 검은 외투를 입은 남자가 지팡이를 짚고 바위 정상에 서 있는 모습이다. 발밑에는 안개를 뚫고 솟은 봉우리 몇 개만 희미하게 보인다. 그림의 제목은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Der Wanderer uber dem Nebelmeer)’. 1818년 독일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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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장관은 14개월간 이어진 대미 투자협상을 이 그림에 빗댔다. 보호무역주의라는 짙은 안개 속에서 “판을 크게 보고 어떻게든 위로 올라가 높은 곳에서 보려고 했다”고 말했다. 실제 관세를 낮추기 위해 시작한 협상은 예상하지 못한 장기전이 됐다. 2000억달러 전략투자의 사업 선정과 원금 회수, 원전 노형, 1500억달러 조선 협력까지 얽힌 고차방정식을 풀어내야 했다.

    김 장관이 협상에서 고수한 기준은 ‘상업적 합리성’이었다. 미국이 제시한 사업이라고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업성이 떨어진다고 판단한 프로젝트는 협상 과정에서 제외했다. 그 대신 1호 사업으로 223억달러 규모 텍사스 엔시날 가스복합발전소를 골랐다. 6.3GW를 한꺼번에 짓지 않고 1.4GW를 먼저 건설한 뒤 수요와 경제성을 보며 확대하는 방식이다. 전체 전략투자의 연간 송금액도 200억달러를 넘지 않도록 했다. 다만 엔시날도 장기 전력구매계약(PPA)을 아직 확보하지 못했다. ‘상업적 합리성’은 이제 실제 수익으로 증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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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전 협상은 더 극적이었다. 미국에 대형 원전 8기를 짓는 프레임워크에 한국형 APR1400 2기가 포함됐다. 나머지 6기는 웨스팅하우스의 AP1000이다. 성사되면 APR1400은 미국에 처음 건설되는 해외 원전 노형이 된다. 1978년 웨스팅하우스 기술로 고리 1호기를 지은 한국이 반세기 만에 자체 노형을 들고 원전 종주국 시장에 들어가는 것이다.

    넘어야 할 산도 있다. 한국 원전의 독자적 해외 진출을 제약해온 웨스팅하우스와의 합의·분쟁종결 협정(SA)부터 손봐야 한다. 기술사용료와 역무, 핵연료 공급 조건이 협상 대상이다. 미국이 요구한 조기 투자도 원전 건설에 오래 걸리는 핵심 기자재를 선발주하는 방식으로 풀기로 했다. 미국은 원전 건설을 앞당기고, 한국 업체가 기자재를 공급하면 투자금 일부가 국내 원전산업의 매출로 돌아온다. ‘미국에 쓰는 돈’을 ‘미국에서 버는 돈’으로 바꾸겠다는 계산이다.


    그러나 이날 발표만으로 성공적인 협상이라고 단정하기는 이르다. 엔시날에서 한국 기업의 참여가 저절로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세계적인 가스터빈 주문 폭주로 국내 업체가 납기를 맞추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 원전 역시 APR1400 두 기의 부지와 착공 일정이 정해지지 않았다. 합의문에 한국 기업의 참여를 강제할 수 있는 장치를 모두 담은 것도 아니다. 김 장관 스스로 이를 협상의 “한계라면 한계”라고 인정했다.

    가장 ‘짙은 안개’는 알래스카 LNG다. 정부는 지난해 말 상업성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약 1300㎞에 이르는 파이프라인 건설에는 인허가와 혹한의 공사 환경, 인력 확보, 비용 초과 등 난제가 수두룩하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의 참여가 확정된 것처럼 사업을 공개적으로 거론했다. 러트닉 미 상무장관은 “한국이 알래스카에 500억달러 넘게 투자한다”고 금액까지 못 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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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작 한미 간 합의는 상업적 합리성을 전제로 사업을 검토하는 단계다. 정부 당국자는 “미국이 정치적으로 활용하고 싶어 한다는 게 보였다. 상업적 합리성이 없으면 추진하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다. 미국 연방정부가 사업권을 넘겨받아 인허가를 단축하고 세제·관세 지원을 한다면 경제성이 달라질 여지가 있다. 하지만 정치·외교적 필요와 실제 사업성을 혼동해선 안 된다. 알래스카 LNG는 김 장관이 14개월 동안 내세운 ‘상업적 합리성’이 미국의 압박 앞에서도 지켜지는지를 보여줄 첫 시험대다.

    김 장관은 14개월 협상을 압축하는 단어로 ‘국익’과 ‘역사’를 말했다. 이번에 결정한 사업은 당대에 끝나지 않고 10년, 20년 뒤까지 이어지고, 원전은 건설에서 해체까지 100년을 내다보는 비즈니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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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드리히의 방랑자’는 정상에 섰지만 안개는 여전하다. 이번 협상도 그렇다. 앞으로 미국 정부도, 통상정책도 몇 번은 바뀔 것이다. 합의문의 문구를 지켜낸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수십 년에 걸쳐 실제 사업의 수익과 한국 기업의 시장으로 바꾸는 것이다. 김정관 장관이 말한 국익은 그때 수치로 확인되고, 역사의 평가는 그 뒤에 내려질 것이다.

    이심기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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