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술과 품질의 상향 평준화로 스펙 경쟁이 한계에 다다르면서 제품 형태의 파격과 단골 붙잡기가 2027년 소비시장의 핵심 생존 전략으로 떠올랐다. 신규 고객 확보의 실익이 떨어진 상황에서 제품의 물성을 바꾸는 '폼팩터 시프트'와 기존 고객 이탈을 막는 '리:텐션 전략'이 기업 실적을 가를 승부처라는 분석이다.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30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트렌드 코리아 2027'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소비트렌드 키워드를 발표했다. 김 교수는 "성능이나 스펙 경쟁이 한계에 이른 시장에서 기업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소비자를 설득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ADVERTISEMENT
소비자들의 지출 태도부터 극단적 실리를 따지는 라이프 투자수익률 형태로 재편되고 있다. 손익을 철저히 계산하는 투자 마인드가 일상 소비와 관계 전반으로 확산하면서, 돈값을 하지 못하거나 손해를 입힌다고 판단되는 순간 가차 없이 소비를 중단하거나 연을 끊는 양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유료 팬 사인회에서 분초 단위로 서비스 시간을 따지는 팬덤 문화가 대표적이다.
이처럼 고객의 이탈이 쉬워진 환경에서 기업의 고객 관리 부문은 '리:텐션 전략'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하고 있다. 인구 감소와 저성장 기조 속에 주요 플랫폼 업체의 신규 고객 유치 비용은 건당 1만5000~2만원 수준까지 치솟았다. 반면 할인 혜택만 챙기고 곧바로 이탈하는 체리피커가 늘어나며 신규 고객 확보의 실익은 크게 낮아졌다.
ADVERTISEMENT
김 교수는 "경쟁의 무게중심을 고객 획득에서 고객 유지로 전환해야 한다"며 해법으로 '역체감'과 '환대'를 꼽았다. 수박 껍질을 손질해 주는 현대백화점 서비스처럼 타사로 돌아갈 때 불편을 느끼게 하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객실에 두고 간 애착 인형을 사진과 함께 돌려보낸 리츠칼튼 호텔처럼 정서적 환대를 제공하는 것 역시 단골을 묶어두는 열쇠로 꼽혔다.
제품 기획 측면에서는 형태를 완전히 뜯어고치는 '폼팩터 시프트'가 활로로 지목됐다. 세제의 세척력이나 TV 화질처럼 스펙을 높이는 전통적 기술 혁신이 한계에 부닥치면서 제품의 물성이나 구조, 소비자의 행동 방식을 전환하는 '형태의 혁신'이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실제 소비시장에서는 이미 형태 변화를 꾀한 상품들이 판도를 흔들고 있다. 삼키는 대신 씹어 쓰는 알약 치약, 고체 샴푸, 국물을 우려내는 코인 육수, 피부에 붙이는 패치형 비타민, 스틱 형태로 손목 등에 문지르는 바르는 향수 등이 대표적이다. 이동성을 부여해 시청 공간의 제약을 없앤 이동형 TV '스탠바이미'나 잔여물을 쉽게 짜내도록 설계한 '거꾸로 세우는 소스 용기' 역시 형태 변화로 소비자의 사용 습관을 바꾼 사례다.
마케팅과 브랜딩 영역에서는 생성형 인공지능의 확산에 맞선 '휴먼엣지'가 프리미엄의 기준으로 떠올랐다. AI가 매끄러운 결과물을 대량 생산할수록 소비자들은 역설적으로 인간의 손길과 시간의 축적에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명품 패션업계가 장인의 제작 공방 시연을 마케팅 전면에 내세우거나, 가죽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에이징되는 파티나 현상이 주목받는 배경이다.
ADVERTISEMENT
패션·뷰티 시장의 차별화 요소로는 기획자와 소비자의 미적 역량을 뜻하는 '안목자본'이 제시됐다. 미국 패션 브랜드 더 로우는 파리 패션쇼장에서 참석자들의 스마트폰 촬영을 금지하고 메모장과 연필을 지급해 큰 화제를 모았다. 소셜미디어 인증용 사진에 의존하는 대신, 옷의 실루엣과 소재의 본질을 관찰하도록 유도하며 고유의 미적 안목을 브랜드 가치로 전환한 사례다.
주목할 만한 핵심 소비 주체로는 '하프시그널' 세대가 꼽혔다. 100세 시대를 맞아 인생의 반환점에 선 X세대가 갱년기를 숨기거나 위축되지 않고 자기 관리와 소비를 통해 적극적으로 맞이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김 교수는 "가정 내 구매력을 쥔 갱년기 부모 세대의 셀프 케어 및 건강 관련 소비는 기업들이 주목해야 할 중요한 틈새시장"이라고 짚었다.
ADVERTISEMENT
이 밖에 책에는 1인 창업과 실행력을 강조한 '해봄경제'를 비롯해 '저장인류', '바이브 워킹' 등이 내년도 10대 키워드로 담겼다. 10대 키워드의 영문 머리글자를 조합한 슬로건은 '알파 쉽'이다. 시류에 순응해 휩쓸려 다니는 양 떼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안목으로 먼저 변화를 실행하는 선도적 존재가 되자는 취지다.
김 교수는 "현대 사회는 중간 지대가 사라지고 앞서거나 뒤처지는 양극화가 극도로 심해지고 있다"며 "어제까지 정답이었던 성공 방정식이 오늘은 성장의 발목을 잡는 시대인 만큼, 관성을 깨고 과감한 폼팩터 혁신과 고객 관리로 시장을 선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ADVERTISEMENT
박상경 한경닷컴 기자 highseou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