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0년대 초반 한국에서 찍힌 사진 한 장이 작년 전 세계 온라인을 뜨겁게 달궜다. 턱에 면도 크림을 바른 미군 남성과 거울을 들어주는 한국인 여성이 서로를 보며 환하게 웃는 장면. 사진 속 표정만으로는 짐작하기 어렵지만, 당시는 6·25전쟁이 벌어지던 시기였다.
ADVERTISEMENT
전쟁의 포화를 뚫은 사랑을 보여주는 이 사진을 두 사람의 손녀가 지난해 8월 미국 온라인 커뮤니티 레딧에 올리자 수백만 명의 관심이 집중됐다.
책 <유선과 랄프>를 낸 두 사람의 아들 찰리 스미스(74)는 온라인에서의 관심을 보며 느낀 감정을 ‘묘한 어긋남’이라고 했다. 어릴 때부터 보며 익숙했던 사진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이야기로 다가올 수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는 의미다.
ADVERTISEMENT
최근 한국을 찾은 그는 한국경제 아르떼와의 인터뷰에서 “늘 좋아했던 사진이지만, 그렇게 많은 사람이 흥미를 느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며 “지금도 사람들이 부모님의 이야기를 이토록 듣고 싶어 한다는 사실이 감동적이다”라고 말했다.

어머니 유선과 아버지 랄프의 인연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한국의 미군 기지에서 시작됐다. 서울의 외투 공장에서 일하던 유선은 전쟁이 터지자 가족이 있는 원주로 향했다. 하지만 고향에 도착했을 때 집은 무너져 있었고, 식구들의 행방도 알 수 없었다. 생계를 위해 인근 미군 기지에서 청소와 편지 전달, 의무대 보조 등 닥치는 대로 일하던 그는 차량 정비공으로 복무하던 랄프를 만났다.
유선이 가족을 찾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게 된 랄프는 함께 차를 타고 기지 주변을 돌아다니며 수소문했다. 랄프는 유선이 끼니를 거르지 않고 편안히 지낼 수 있도록 챙겼다고 한다. 끝내 가족의 소식은 듣지 못했지만, 함께 다니는 동안 두 사람은 서로에게 마음을 열었다. 유선은 훗날 아들에게 그 무렵부터 아버지를 사랑하게 됐다고 전했다. 한국에서 아들을 낳은 이들은 전쟁이 끝난 뒤 미국으로 함께 건너갔다.
ADVERTISEMENT

이곳에서 어머니 유선은 영어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새 삶을 꾸려냈다. 그런 만큼 아들에게 어머니는 늘 당차고 강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스미스 씨는 책을 준비하며 자신이 잘 안다고 생각했던 어머니를 새롭게 만났다고 전했다. 그가 살펴본 기록에는 아들이 충분히 알지 못했던 어머니의 외로움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에 처음 도착한 유선은 심한 향수병을 앓았고, 먹고 싶은 한국 음식조차 구하기 어려워 힘겨워했다. 그는 “그 기록을 보고서야 미국에 막 도착했을 때 어머니가 얼마나 슬퍼했는지 알게 됐다”고 말했다.
ADVERTISEMENT
출장이 잦았던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보낸 편지에서는 또 다른 모습도 찾을 수 있었다. 유선은 남편에게 ‘아직도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곤 했다. 아들에게 자신감이 넘쳤던 어머니도 멀리 떨어진 남편의 사랑을 거듭 확인하고 싶어 했다. 스미스 씨는 “나이 든 제가 젊은 부모님의 편지를 읽으면서 어릴 때는 감히 헤아릴 수 없었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ADVERTISEMENT
고향을 향한 어머니의 그리움은 수십 년이 지나 북한에서 소식이 오면서 다시 불이 붙었다. 1990년, 북한에 살던 친오빠 소식이 들려온 것. 그에게서 편지가 왔다는 전화를 받았지만, 처음에는 의심했다. 아들 스미스 씨 역시 ‘전형적인 사기극’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편지에는 의심을 단칼에 자를 수 있는 단서가 있었다. 편지 속 오빠는 ‘어릴 적 우리 함께 부르든 노래, 밝은 달과 계수나무가 나오는 그 노래를 아직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그 뒤 어머니는 이산가족 찾기 행사를 통해 북한의 가족들을 만날 수 있었다. 책에는 만남 이후 북녘 가족과 주고받은 편지들이 실려 있다. “보고 싶고 포옹하고 싶은 마음, 안아보고 두드려보고 때려보고 싶은 마음 어떻게 이 작은 종이 위에 다 적을 수 있겠니?” 오래 헤어져 지낸 혈육을 향한 마음이 종이 위에 쏟아져 있다. 스미스 씨는 “편지를 읽으며 북한에 있는 이들도 우리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부모님의 기록은 이제 공적 성격도 띠게 됐다. 스미스 씨가 기증한 사진과 편지는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도 전시됐다. 그는 어머니의 이야기가 6·25전쟁이라는 슬픈 역사를 갖고 있는 한국 독자들에게 널리 읽힌다는 데도 각별한 의미를 뒀다.
그는 독자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로 ‘희망’을 꼽았다. “부모님은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몰랐기에 큰 꿈을 꾸지 못했어요. 하지만 이후 멋진 삶을 사셨죠. 지금의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앞으로 좋은 삶을 살 기회가 있다는 희망을 독자들이 느꼈으면 합니다.”
최한종 기자 onebel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