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에 진출해 있는 국내 주력 제조업계에 최근 비상이 걸렸었다. 베트남 정부가 독자적인 전략물자 수출통제 제도 시행에 나서면서, 자칫 일반 수출 품목까지 광범위하게 통제망에 묶여 수출 전선이 마비될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수출 심사 문턱을 넘지 못할 품목들이 지나치게 많이 잡힐 수 있어 베트남 주재 한국 기업에는 수출 직격탄이 될 수 있었다. 민·관의 발 빠른 대응으로 통관 대란은 피했지만, 정부는 신흥 제조기지로 번지는 수출통제에 대응하기 위해 현지 진출 기업을 보호할 '한국식 수출통제 모델' 전수에 나섰다.
◆민관 합동으로 베트남 공략
29일 업계 등에 따르면 베트남은 지난해 전략물자 수출통제 제도 도입을 발표하고 올해 6월부터 본격 시행에 들어갔다. 문제는 베트남 정부가 통제 기준으로 삼은 분류 방식이었다. 통상 한국과 미국, 일본, 독일 등 첨단 산업 기반을 갖춘 국가들은 5자리 기술 코드인 ECCN을 활용한다. 반도체 분야의 노광장비처럼 특정 핵심 품목을 정밀하게 골라내 수출 가능 여부를 가려내기 위해서다.ADVERTISEMENT
그러나 베트남은 지난해 10월 시행령을 통해 ECCN 대신 일반 관세 분류 체계(HS코드)를 활용한 수출 통제 방식을 발표했다. 이는 현지 진출 기업들의 불안을 키웠다. 통제 대상이 아닌 일반 부품까지 기업이 일일이 비통제 품목임을 입증해야 하는 소명 부담이 커졌기 때문이다. A기업 관계자는 "베트남 현지 세관과 관할 부처가 ECCN과 같은 수출통제 역량이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관련 제도를 도입하느라 현지 기업들이 상당한 혼란을 겪었다"고 말했다.

이에 산업통상부 무역안보정책국이 베트남 측과 협의에 착수했다. 산업부는 기업 애로를 베트남 측에 전달해 세관 단계에서 비통제 품목의 분류 체계를 정비하도록 이끌어냈다. 베트남 당국이 일반 가전이나 IT 제품에 흔히 쓰이는 저사양 컴퓨터 프로세서까지 전략물자로 묶어 규제하려 하자, 정부는 무기 전용 우려가 있는 첨단 고사양 칩만 통제하는 국제 표준 기준을 역제안해 관철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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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용 반도체가 규제망에 걸려 주요 생산 라인의 완제품 수출이 중단될 뻔한 위기를 선제적으로 차단한 것이다. 올해 4월에는 베트남이 한국식 수출통제 제도를 벤치마킹하고 상시 소통할 수 있도록 양국 간 '수출통제 협력 MOU'를 체결했다.
하지만 수출통제 제도를 처음 도입한 베트남에서는 이후에도 각종 난관이 이어졌다. 기업들이 특히 문제를 제기한 것은 내부자율준수(ICP) 요건이다. 통상 ICP 인증을 받은 기업은 1년간 개별 수출허가 없이 수출할 수 있는 포괄허가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베트남이 제도를 처음 도입하면서도 'ICP를 2년간 운영한 실적'을 요구해 사실상 포괄허가 취득이 불가능한 문제가 발생했다.
수출허가 심사 과정에서 일반적인 발주서(PO) 대신 정식 계약서 제출을 요구한 것도 통관 지연과 행정 부담으로 이어졌다. 이 같은 애로사항을 접수한 정부는 지난 11일 서울에서 열린 제1차 한·베트남 수출통제 대화에서 베트남 당국에 기업들의 애로를 전달하고 제도 개선을 요청했다. 4월 맺은 MOU를 통해 개설한 소통 채널이 본격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수출품 된 K수출통제
한국이 베트남 수출통제 제도 안착에 공을 들이는 것은 현지 공급망에서 한국 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베트남에는 1만100개 이상의 한국 기업이 진출해 있다. 지난해 베트남 내 한국 기업의 수출액은 1165억달러로 현지 기업에 이어 두 번째로 컸다. 특히 삼성전자·LG전자·포스코·효성·SK 등 대형 제조기업을 중심으로 반도체와 전자부품 등 중간재 공급망이 촘촘하게 연결돼 있다. 한국 정부는 베트남을 계기로 '한국식 수출통제' 시스템의 해외 수출에 속도를 내고 있다. 미국과의 통상·관세 협상 과정에서 공급망 안보 요건을 맞추기 위해 전략물자 수출통제 제도를 새롭게 구축하려는 아세안 국가들이 늘면서 관련 제도 전수 수요가 급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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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국가가 한국 제도를 주목하는 것은 일본 등 주요 경쟁국과 차별화되는 제도적 강점 때문이다. 한국은 전략물자 해당 여부를 가려내는 '판정'과 실제 수출을 승인하는 '허가' 기능을 분리해 운영한다. 전문 공공기관인 무역안보관리원이 기술적 판정을 담당하고, 산업통상부는 수출 허가와 정책에 집중하는 방식이다.
특히 기업의 행정 부담을 덜어주는 '투트랙 판정'이 강점으로 꼽힌다. 일본은 정부가 판정을 지원하지 않아 수출자가 경산성의 매트릭스표(Excel)를 대조해 자신의 책임으로 규제 여부를 가려야 한다. 민간 안전보장무역정보센터(CISTEC)는 유료인 데다 법적 효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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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한국은 공공기관인 무역안보관리원이 법적 효력이 있는 전문판정을 무료로 제공할 뿐 아니라, 개별 기업이 온라인 시스템(Yestrade)을 통해 스스로 전략물자 여부를 가려내는 '자가판정'도 지원한다.
여기에 기업의 전략물자 관리 역량을 평가해 우수 기업에 허가 면제와 서류 간소화 등의 혜택을 주는 등급별 자율준수(CP) 제도까지 갖췄다. 정부 관계자는 "한국형 수출통제 모델을 해외에 안착시키면 신흥국과의 경제안보 협력을 공고히 하는 동시에, 현지에 진출한 우리 기업들의 통관 애로를 사전에 예방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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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정부 관계자들은 지난 5월 한국을 방문해 전략물자 수출통제 제도를 교육받고, 한국식 수출허가 체계와 법·제도를 자국 제도의 참고 모델로 활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무역안보관리원은 내년부터 베트남 현지에 상주 인력을 파견해 제도 정착과 우리 기업 지원을 이어갈 계획이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