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춘추전국시대에 편찬된 <국어(國語)>라는 책에는 미개한 습지에 사는 야만족인 적(狄)과 융(戎)이 등장한다. 이후 고대 중국인의 사고에서 이민족은 거주 지역에 따라 남쪽의 만(蠻), 동쪽의 이(夷), 서쪽의 융, 북쪽의 적으로 정형화했다. 동시에 이들은 흉포한 습성을 지닌 동물에 비유됐다. ‘적’과 ‘만’이라는 글자는 ‘개와 벌레의 종족’이라는 뜻도 담고 있다.자신이 속한 집단을 높이고, 외부 세력을 폄훼하는 사고방식은 동서고금을 통해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경쟁 관계인 상대를 비하하는 멸칭은 자연스럽게 발전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비에선 이웃 나라 국왕을 신하라는 뜻의 ‘노객(奴客·노예 손님)’ ‘궤왕(?王·꿇어앉은 왕)’으로 낮춰 불렀다. 적대국 백제를 겨냥해선 ‘백잔(百殘)’ ‘잔국(殘國)’ ‘잔주(殘主)’ 같은 비칭을 총동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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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 집단을 폄훼하는 것은 내부 결속을 강화하는 효과가 크다. 아돌프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유대인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기생충’ ‘바이러스’ ‘흑사병’ 같은 수식어를 덧붙였다. 유대인에 대한 적개심은 독일 군중심리를 자극하는 불쏘시개였다.
멸칭을 쓰는 것은 타협의 가능성을 줄이는 자승자박이기도 했다. 한번 내뱉은 말은 도로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험한 말을 주고받은 사이에서 관계 회복의 열쇠는 비난의 굴레를 끊은 인물에게 쥐여졌다. 미·중 수교를 위해 중국을 찾은 헨리 키신저 미국 국무장관이 내뱉은 “미 제국주의자 중에서 중국 땅을 제일 먼저 밟는다”는 한마디에 수십 년간 쌓인 적대 감정이 녹아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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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권에서 멸칭 사용을 자제하자는 움직임이 잇달아 나왔다. 주요 정책을 둘러싼 이견 탓에 더불어민주당 내에서 주요 정치인의 이름을 딴 ‘문조털래유’나 ‘한강새똥돼주길’과 같은 극단적인 표현을 주고받으며 내분이 격화한 탓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멸칭과 혐오로 갈등과 적대를 키우는 행위를 자제할 것’을 당부했고, 김민석 민주당 대표도 “멸칭을 최소화하는 것부터 시작하자”고 동조했다. 비난으로 이룰 것은 없다. 멸칭은 패배자의 자기 위안에 불과하다는 점을 명심하길 바란다.
김동욱 논설위원 kimd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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