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한국에는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가 없을까.”이정은 채율 대표가 스무 살 무렵부터 품어온 질문이다. 채율은 한국 전통공예의 재료와 장인 기술을 현대적인 디자인으로 재해석하는 브랜드다. 이 대표가 한국산 명품을 만들기 위해 한국의 장인과 공예 현장을 누빈 시간이 18년이다. 이 대표가 그동안의 고민을 담은 신간 <채율하다>를 내놨다.
ADVERTISEMENT
채율은 지난주 서울 신사동 가로수길 자사 플래그십스토어에서 출간을 기념한 ‘채율 북살롱’을 열었다. 18년 동안 채율이라는 브랜드를 만들며 겪은 시행착오와 장인들과 함께 물건을 만들어온 시간을 독자들과 나누는 자리였다. 나전과 옻칠 등 전통 공예 기법을 적용한 가구와 오브제가 놓인 공간에서 채율의 시작과 앞으로의 방향을 되짚었다.
채율은 나전과 옻칠, 칠보 등 오래된 한국의 공예 기술을 적용한 현대식 제품을 주로 디자인한다. 옛 공예품을 그대로 복원하기보다 장인의 기술과 재료를 살리면서 현재의 생활에 어울리는 가구와 보석함, 테이블웨어, 장식품 등을 만들어왔다. 브랜드명 ‘채율(彩律)’에는 ‘전통의 색을 다스린다’는 의미를 담았다.
ADVERTISEMENT
이 대표는 박물관 학예사를 꿈꾸며 불교미술학을 공부했다. 디자인경영학 석사과정에서 브랜딩 전략을 연구하면서 전통미술에 대한 관심을 사업으로 확장했다. 채율은 2008년 창업했다. 2008년 대학을 휴학하고 뉴욕에 머물던 이 대표는 CNN 속보를 통해 숭례문이 불타는 모습을 지켜보게 된다. 이 대표는 "불길에 지붕이 무너지고 수백 년 된 목조 건물이 사라지는 장면을 보며,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것만큼 그것을 만들어온 기술을 오늘의 생활 속에서 계속 쓰이게 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당시 머물던 뉴욕 5번가에선 에르메스와 샤넬, 루이비통 등 오랜 역사를 지닌 브랜드의 매장이 즐비했는데, 이를 눈여겨 보던 이 대표는 “오랜 공예 기술을 가진 한국에는 왜 이들과 나란히 놓일 만한 브랜드가 없을까”라는 질문을 품었다고 했다. 그 질문이 브랜드의 창업으로 이어진 것이다.
채율은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 이름이 알려져 있다. 특시 정상 외교와 글로벌 명사들의 선물로 각광받았다. 2022년 조 바이든 당시 미국 대통령의 방한 때 청와대에서 선물한 ‘나비국화당초 서안’이 채율 제품이었다. 나전으로 나비와 국화·당초 문양을 새긴 전통 좌식 책상으로, 채율의 대표적인 나전·옻칠 기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도 채율 제품이 선물로 전달됐다.
해외 재계와 문화계 인사들의 소장 사례도 이어졌다.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와 베르나르 아르노 LVMH 회장, 프랑수아 피노 케링그룹 창업자 등이 채율 제품을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ADVERTISEMENT
해외 브랜드와의 협업은 채율이 전통공예를 글로벌 상품으로 확장하는 계기가 됐다. 오스트리아 와인글라스 브랜드 리델과 협업한 것을 비롯해 루이비통 등 럭셔리 브랜드와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장인이 제작한 나전·옻칠 등 전통 기법을 브랜드의 제품과 공간에 접목하는 방식이다. 이를 통해 공예품을 감상의 대상에만 머물게 하지 않고 글로벌 럭셔리 시장에서 통용되는 생활 오브제와 제품으로 영역을 넓혀왔다고 채율 측은 설명했다. 작년엔 미국 매체 뉴욕타임스가 채율을 한국 전통공예에 기반을 둔 브랜드로 소개하기도 했다.

채율은 다음 과제로 장인 기술의 계승을 꼽고 있다. 18년간 축적한 브랜드 운영 경험을 바탕으로 장인의 기술을 교육과 일자리로 연결하는 ‘채율장인학교’를 구상하고 있다. LVMH가 운영하는 장인기술 교육기관 ‘메티에 덱셀랑스 인스티튜트’와 반클리프 아펠이 후원하는 주얼리 교육기관 ‘레꼴’ 등을 주목해 살피고 있다. 이 기관들처럼 한국 전통공예를 현대적인 상품으로 바꾸는 데서 한발 더 나아가, 그 기술이 다음 세대까지 이어질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겠다는 목표다.
ADVERTISEMENT
이 대표는 "기술을 가르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배운 사람이 실제 현장에서 일하고 다시 후배를 가르칠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안혜원 기자 anhw@hankyung.com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