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실 실험 기술로 여겨지던 양자컴퓨터가 산업 현장으로 나오고 있다. 신약후보 물질 탐색부터 신소재와 배터리, 자동차 생산 최적화까지 활용처가 넓어지고 있는 것이다. 아직 슈퍼컴퓨터를 대체하는 단계는 아니지만, 기존 컴퓨터가 잘하는 계산과 양자컴퓨터가 잘하는 계산을 나눠 처리하는 ‘하이브리드 방식’에서 성과가 나오기 시작했다.미국 양자 소프트웨어 기업 QC웨어와 아이온큐는 QC웨어의 ‘프로메튬’ 플랫폼과 아이온큐의 이온트랩 양자컴퓨터 ‘포르테’를 결합해 신약 개발에 활용할 수 있는 양자·고전 하이브리드 화학 계산을 실증하는 데 성공했다고 지난 1일 밝혔다. 두 회사는 약물이 몸속에서 분해되는 과정에 관여하는 ‘사이토크롬 P450’ 계열 효소를 대상으로 정전기적 상호작용 에너지를 계산했다. 약물과 효소 사이에 작용하는 힘을 양자컴퓨터로 계산한 것이다.
ADVERTISEMENT
그 결과 기존 계산의 기준값과 오차가 0.5㎉/㏖(몰당 킬로칼로리)에 불과했다. 이는 통상 화학 분야에서 ‘화학적 정확도’로 평가하는 1㎉/㏖ 한계선을 극복한 성과다. 스콧 밀라드 아이온큐 최고비즈니스책임자(CBO)는 “신약후보 물질의 결합력과 독성 위험을 후보 선정 단계에서 고정밀도로 파악할 수 있게 됐다”며 “임상 전 단계에서 발생하던 막대한 실패 비용과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약 개발에선 분자가 특정 단백질과 얼마나 강하게 결합하는지 정확히 계산하는 능력이 매우 중요하다. 수많은 화합물 가운데 특정 단백질에 잘 달라붙어 원하는 효과를 내는 물질을 찾아야 한다. 현재는 인공지능(AI)과 슈퍼컴퓨터로 후보군을 추린 뒤 실제 실험을 반복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계산의 정확도가 떨어지면 가능성이 낮은 후보까지 실험해야 해 시간과 비용이 증가한다.
ADVERTISEMENT
양자컴퓨터가 이를 극복해내는 수단으로 자리 잡고 있다. 분자가 복잡해질수록 분자를 이루는 전자의 움직임을 기존 컴퓨터로 정확하게 계산하기가 급격히 어려워진다. 양자컴퓨터를 활용하면 이런 계산의 정확도를 높여 실패할 가능성이 큰 후보물질을 실험 전에 걸러낼 수 있다.
신소재 분야도 유력한 활용처로 꼽힌다. 원자와 전자의 상호작용은 물질 규모가 커질수록 계산량이 급격히 증가한다. 양자컴퓨터는 양자상태를 활용한다는 특성 때문에 배터리와 반도체 소재, 탄소 포집 촉매, 극한 환경을 견뎌야 하는 핵융합 소재 등의 후보 탐색에 이용될 가능성이 있다.
자동차산업에서는 소재뿐 아니라 공장 운영과 공급망 최적화 등이 주요 적용 분야로 거론된다. 양자 최적화와 머신러닝, 화학 시뮬레이션을 차량 설계부터 생산·물류까지 적용하려는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보안은 양자컴퓨터 발전에 가장 먼저 대응해야 하는 분야로 꼽힌다. 고성능 양자컴퓨터가 등장하면 현재 인터넷과 금융망에서 사용하는 암호체계를 풀 가능성이 크다. 지금 암호화된 데이터를 훔쳐 보관했다가 미래에 양자컴퓨터로 해독하는 ‘수확 후 해독’ 공격도 우려된다. 이에 따라 각국 정부와 기업은 양자키분배(QKD), 양자내성암호(PQC)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양자컴퓨터의 경쟁 무대가 ‘누가 더 많은 큐비트를 만드느냐’에서 ‘실제 산업 문제를 누가 먼저 해결하느냐’로 이동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ADVERTISEMENT
라현진 기자 raraland@hankyung.com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