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위스키 시장의 성장세가 꺾였지만 위스키의 ‘나이’는 거꾸로 많아지고 있다. 발베니가 88년간 숙성한 세계 최고령 싱글몰트 위스키를 내놓은 데 이어 글로벌 위스키 업체들이 수십 년 이상 숙성한 초고연산 제품을 잇달아 선보이고 있다. 대중적인 위스키 소비가 줄어드는 가운데서도 희소성과 수집 가치를 앞세운 초고가 시장은 성장하면서 위스키 시장이 양극화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5일 주류업계에 따르면 발베니는 지난 1일 서울 성수동에서 ‘1931 컬렉션 88년’을 세계 최초로 공개했다. 1931년 3월 5일 스페인 헤레즈산 유러피안 오크 셰리 버트에 담긴 뒤 88년간 숙성해 2019년 병입한 제품이다. 전 세계에 존재하는 물량은 단 17병이다. 기존 최고령 기록이던 고든앤맥파일의 글렌리벳 85년을 넘어 현재까지 출시된 싱글몰트 스카치위스키 가운데 가장 긴 숙성 연수를 기록했다. 발베니는 판매가격도 공개하지 않고 일부 프라이빗 고객과 컬렉터를 대상으로 판매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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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위스키업계에서는 이처럼 ‘시간’을 상품으로 만드는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스코틀랜드 올드풀트니는 창립 200주년을 맞아 올해 증류소 역사상 최고 연산인 50년산을 내놨다. 50년간 숙성한 캐스크 네 개의 원액을 합쳐 전 세계에서 200병만 판매한다. 30년산도 1000병 한정으로 함께 선보였다.

지난해에는 고든앤맥파일이 1940년 증류한 글렌리벳 원액을 85년간 숙성해 125병을 내놓으며 당시 세계 최고령 기록을 세웠다. 병입 시점에도 알코올 도수 43.7%를 유지했다. 불과 1년 만에 발베니가 88년산으로 기록을 다시 갈아치운 것이다.
고연산 제품 경쟁은 전체 위스키 시장 상황과 정반대로 움직이고 있다. 국내 위스키 수입량은 올해 1~7월 1만658t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1만4026t보다 24.0% 감소했다. 지난해 연간 수입량도 2만2582t으로 전년보다 17.7% 줄었다. 코로나19 이후 홈술·혼술 문화와 함께 폭발적으로 성장했던 위스키 시장이 양적 성장의 한계에 부딪혔다는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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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비싼 위스키를 찾는 소비자는 오히려 늘었다. 지난해 이마트에서 3만~10만원 위스키 매출은 전년보다 19% 감소했지만 10만~20만원 제품은 34%, 20만원 이상 제품은 28% 증가했다. 롯데마트에서도 10만원 이상 프리미엄 위스키의 매출 비중이 2024년 42.9%에서 지난해 49.0%로 뛰었다. 반대로 3만~10만원대 제품 비중은 49.5%에서 42.4%로 낮아졌다. 중간 가격대 소비는 줄고 가성비 제품과 고가 제품으로 수요가 갈리는 모습이다.

한정판에 대한 반응은 더 극단적이다. 캄파리코리아가 올해 국내에 처음 선보인 ‘부나하벤 21년 캐스크 스트랭스’는 판매를 시작한 지 약 1시간 만에 준비 물량이 모두 소진됐다. 전체 위스키 소비량은 줄어들고 있지만 특정 연산이나 캐스크, 한정판을 골라 찾는 마니아 수요는 여전히 강하다는 의미다.
업체들은 제품의 희소성뿐 아니라 이를 만든 사람과 제조 방식까지 상품화하고 있다. 캄파리코리아는 오는 8일 29세에 스카치위스키 업계 최연소 여성 마스터 블렌더에 오른 줄리앤 페르난데스를 한국으로 초청한다. 페르난데스는 부나하벤을 비롯한 위스키의 캐스크 선정과 숙성 관리, 블렌딩을 총괄하는 인물이다. 서울 한남동에서 소비자를 대상으로 직접 제품을 설명하고 음식과 위스키를 함께 맛보는 페어링 행사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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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키 업체들이 초고연산 제품에 공을 들이는 이유도 판매량 자체보다 브랜드 가치를 끌어올리는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수십 년간 살아남은 캐스크 한 통은 해당 증류소가 얼마나 오랫동안 원액과 재고를 관리해왔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자산이다. 명품업체가 수억원짜리 하이주얼리를 앞세워 브랜드 이미지를 끌어올리는 것과 비슷한 전략이다.
실제 발베니는 88년산 한 병만 내놓은 것이 아니다. 1931년 증류소에 직접 몰팅 시설을 만든 역사에 맞춰 12년과 15년 제품까지 ‘1931 컬렉션’으로 묶었다. 소비자가 실제 구매하기 어려운 88년산으로 브랜드의 헤리티지를 보여준 뒤 상대적으로 접근 가능한 제품군으로 관심을 확산시키는 일종의 ‘헤일로 효과’를 노린 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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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프리미엄 위스키 경쟁의 주요 무대로 떠오른 점도 눈에 띈다. 발베니는 지난해에도 50년 컬렉션을 서울에서 공개하고 국내에 3병을 들여왔다. 윌리엄그랜트앤선즈코리아 매출은 2019년 266억원에서 2024년 1015억원으로 약 네 배로 증가했다. 올해 세계에 단 17병뿐인 88년산의 첫 공개 장소 역시 서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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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나하벤 역시 한정판 완판에 이어 마스터 블렌더의 첫 방한과 소비자 마스터 클래스까지 열며 한국 시장과의 접점을 확대하고 있다. 단순히 병을 수입해 판매하는 데서 벗어나 ‘누가 어떻게 만든 술인지’를 직접 경험하도록 하는 방향으로 마케팅 방식도 바뀌고 있다는 분석이다.

결국 국내 위스키 시장은 ‘붐이 끝났다’기보다 소비 방식이 달라지고 있다는평가가 나온다. 코로나19 당시처럼 여러 브랜드의 판매량이 동시에 늘어나는 대중적 성장 국면은 지나갔지만, 하이볼용 저가 제품과 희소성을 중시하는 고가·고연산 제품은 상대적으로 수요가 견조하다. 반면 특징이 뚜렷하지 않은 중간 가격대 제품은 설 자리가 좁아지고 있다.
주류업계 관계자는 “고연산 위스키는 판매량보다 증류소가 가진 역사와 희소성을 증명하는 상품이라는 의미가 크다”며 “전체 위스키 소비가 둔화하더라도 한정판이나 특정 캐스크, 초고연산 제품을 찾는 소비자를 잡기 위한 경쟁은 오히려 강해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권용훈 기자 fac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