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근대화의 주역 사카모토 료마는 해운과 무역을 통해 일본이 세계로 나가는 미래를 꿈꿨다. 미쓰비시그룹 창업자 이와사키 야타로는 도사번의 무역 실무를 맡아 료마의 가이엔타이(海援隊)를 지원했고 이후 해운·무역 사업을 키우며 훗날 일본 종합상사로 이어지는 기반을 만들었다. 160년 가까이 흐른 지금도 일본 종합상사들은 자신들의 역할을 단순한 ‘장사’ 이상으로 규정한다. 미쓰비시상사는 스스로의 역할에 대해 “일본의 국익을 위해 살아간다”(나카니시 가쓰야 사장)고 정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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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공급망 지키는 상사들
올봄 호르무즈해협이 사실상 봉쇄되면서 중동산 나프타 공급이 막히자 이 말은 현실이 됐다. 일본 화학업체들 사이에서 “드럼 한 통이라도 좋으니 당장 달라”는 요청이 쇄도하자 미쓰비시상사는 일본 내 10곳의 비축 탱크에서 재고를 긴급 방출했다. 한국에서 대체 물량을 들여왔고 액화천연가스(LNG)는 자체 개발한 캐나다산으로 보완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스미토모창고는 최근 호르무즈해협을 통과하지 않고 일본에서 사우디아라비아로 화물을 운송하는 대체 물류루트를 실용화했다. 스미토모창고가 마련한 대체 루트는 일본 고베항 등에서 오만 남부 살랄라항까지 해상으로 화물을 보낸 뒤 육로를 통해 루브알할리 사막 국경을 넘어 사우디아라비아 동부 담맘 인근까지 운송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호르무즈해협 주변의 물류 차질이 장기화하면서 기업들의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
일본 나프타 수입의 약 40%를 담당하는 마루베니도 움직였다. 오모토 마사유키 사장은 “공급망 유지가 우선”이라며 단기 수익보다 물량 확보를 앞세웠다. 미국산 물량이 글로벌 자원 메이저에 선점되자 현지 주재원들의 정보를 토대로 페루와 인도까지 새로운 조달처를 찾아냈다.
일부 납품은 늦어졌지만 원료 자체가 끊기는 사태는 막았다. 에너지 자급률이 약 15%에 불과한 일본에서 종합상사가 유사시 국가 공급망을 지키는 ‘민간 인프라’ 역할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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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부터 LNG까지…세계에 뿌리내린 ‘쇼샤’
일본 종합상사는 세계적으로도 독특한 기업 형태다. 미쓰비시상사, 이토추상사, 미쓰이물산, 스미토모상사, 마루베니 등 5대 상사는 에너지와 광물부터 식품, 기계, 유통, 전력, 부동산, 방위산업까지 사업 영역을 가리지 않는다.
5대 상사가 해외에 파견한 주재원만 약 5000명이다. 일본무역회의 회장을 맡고 있는 오카후지 마사히로 이토추상사 회장은 “분산돼 있기 때문에 다양한 정보가 모인다”고 말한다. 세계 각지에 깔린 사람과 거래망은 평소에는 돈이 될 사업을 찾는 정보망이지만 위기 때는 공급망을 다시 연결하는 네트워크가 된다. 일본의 종합상사는 전후 고도성장 과정에서 더욱 강해졌다. 자원이 없는 일본이 해외에서 원료를 들여와 제품을 만들고 다시 세계에 수출하려면 자원 확보와 물류, 금융, 해외 판매망을 한꺼번에 담당할 기업이 필요했다.
하지만 상사가 언제나 각광받았던 것은 아니다. 1990년대 이후 제조업체들이 직접 해외 거래에 나서고 인터넷 거래가 확산되자 “중간상을 거칠 필요가 없다”는 ‘상사 불필요론’이 반복해서 등장했다. 여러 사업을 한꺼번에 보유한다는 이유로 기업가치가 절하되기도 했다.
무역회사에서 ‘포트폴리오 매니저’로
살아남은 방법은 사업 모델을 바꾸는 것이었다. 종합상사는 단순히 상품을 중개해 수수료를 받는 회사에서 벗어나 직접 자원개발에 참여하고 기업을 인수하며 사업을 운영하는 투자회사로 변신했다. 돈을 벌지 못하는 사업에서 철수하는 결단도 빨라졌다.
미쓰비시상사는 2024년 호주 원료탄 사업 일부를 매각했다. 불과 2년 전까지 핵심 수익원으로 꼽히던 사업이었다. UBS증권은 이를 두고 “상사가 포트폴리오 매니저로 변모했다”고 평가했다. 어떤 사업을 살 것인가만큼 어떤 사업을 팔 것인가가 중요해진 것이다.
이 변화를 일찍 알아본 투자자가 워런 버핏이다. 버핏이 이끄는 벅셔해서웨이는 2019년부터 일본 5대 종합상사 주식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현재 각 회사 지분을 약 10%씩 보유한 대주주다. 벅셔의 투자 이후 5개사의 합산 시가총액은 약 7년 만에 5배로 늘었다. 버핏의 후계자인 그레그 에이블 벅셔 최고경영자(CEO)도 일본 상사 지분을 장기 보유하겠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오는 9월에는 CEO 취임 후 처음 일본을 찾아 주요 상사 경영진과 만날 예정이다. 실적도 달라졌다. 5대 상사는 최근 5년간 합계 기준으로 매년 3조엔 이상의 순이익을 냈다. 과거에는 지나치게 복잡하다고 평가받았던 사업구조가 공급망이 흔들리고 자원을 서로 빼앗는 시대가 되자 오히려 경쟁력으로 바뀐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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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자원무기화…유럽도 “일본식 쇼사를 배우자”
일본식 종합상사를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지고 있다. 중국이 희토류와 핵심 광물의 수출을 무기로 활용하면서 유럽에서는 정부와 기업이 공동으로 세계 자원 권익을 확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BMW 등 독일 제조업체들이 일본 종합상사의 사업 모델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정부에 제안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종합상사는 정부기관이 아니면서도 세계 곳곳에서 자원 권익을 확보하고, 현지 기업과 거래하며, 필요한 경우 금융까지 제공한다. 기업의 수익 추구와 국가의 경제안보가 자연스럽게 겹치는 구조다.
특히 수입 의존도가 높은 일본에서는 이런 역할이 더욱 중요하다. 에너지뿐 아니라 광물, 식량, 물, 반도체와 데이터 등 확보해야 할 전략 자원의 범위가 갈수록 넓어지고 있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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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로 진화하는 종합상사
다음 위협은 인공지능(AI)이다. 과거 종합상사의 힘은 정보 격차에서 나왔다. 세계 각지의 주재원이 현장에서 얻은 정보를 도쿄 본사에 전달하고 이를 토대로 경쟁 기업보다 먼저 사업 기회를 잡았다.
하지만 AI가 전 세계의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모으고 분석하는 시대가 되면 ‘정보를 많이 갖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경쟁력을 유지하기 어렵다. 상사들은 AI를 경쟁자가 아니라 ‘안목을 높이는 도구’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스미토모상사는 과거 투자 1500건의 사내 회의록과 4000건의 손실 보고서를 AI에 학습시켰다. 투자 당시 놓쳤던 위험 신호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AI가 찾아내도록 해 다음 투자 실패를 줄이려는 것이다.
AI 시대 종합상사의 경쟁력은 정보를 얼마나 많이 모으느냐보다 그 정보 가운데 무엇이 중요한지를 가려내는 능력에 달렸다는 분석이다. AI가 수천 개 투자 후보를 제시해도 마지막으로 어떤 사업에 돈을 넣고 무엇을 포기할지는 사람의 판단 영역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세계가 다시 자원과 공급망을 놓고 경쟁하는 시대가 되면서 종합상사는 새로운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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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최만수 한국경제 특파원
bebo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