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경 로앤비즈의 'Law Street' 칼럼은 기업과 개인에게 실용적인 법률 지식을 제공합니다. 전문 변호사들이
조세, 상속, 노동, 공정거래, M&A, 금융 등 다양한 분야의 법률 이슈를 다루며, 주요 판결 분석도 제공합니다.
ADVERTISEMENT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프로크루스테스(Procrustes)라는 악당이 있다. 아테네로 향하는 길목에 살던 그는 지나가는 여행객을 집으로 불러들여 쇠로 만든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여행객의 키가 침대보다 길면 튀어나온 다리를 잘라냈고, 반대로 키가 짧으면 침대 길이에 맞을 때까지 팔다리를 억지로 잡아 늘렸다. 누구나 똑같은 침대에 맞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원칙이었다. 사람마다 키가 달라 침대에 맞지 않더라도 사람을 고치면 그만이었다.
오늘날에도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는 하나의 획일적인 기준에 사람을 억지로 맞추는 주객이 전도된 사고방식을 뜻한다. 사람의 다양한 개성과 능력을 무시하고 인위적인 기준에 사람을 맞추는 것이다. 수천 년 전 만들어진 신화지만 인간 사회가 반복해서 빠지는 유혹을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보여준다.
평등이 '같음'을 강요할 때
미국 소설가 커트 보니것의 SF 소설 『해리슨 버저론』에는 이와 놀랍도록 닮은 미래 디스토피아 사회가 등장한다. 이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이 완벽히 평등해야 하고, 이를 위해 재능이 뛰어날수록 더 큰 제약을 가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아름다운 사람은 못생긴 가면을 쓰고, 힘이 센 사람은 무거운 쇳덩이를 몸에 달아야 한다. 지능이 뛰어난 사람은 날카로운 소음으로 깊은 생각을 방해하는 장치를 착용해야 한다. 모두를 끌어올리는 대신 뛰어난 사람을 끌어내려 평균에 맞추는 것이다.주인공 해리슨 버저론은 신체와 지적 능력이 모두 탁월한 인물이다. 그래서 누구보다 무거운 쇳덩이와 각종 제약 장치를 달고 살아야 한다. 하지만 정부의 구금에서 탈출한 해리슨은 방송국에 난입해 자신을 짓누르던 제약 장치를 뜯어내고, 한 발레리나의 가면과 제약도 벗겨낸다. 두 사람은 억눌렸던 능력을 마음껏 펼치며 춤을 추지만 곧 정부 책임자에 의해 사살된다. 해리슨이 제거된 것은 남의 자유를 빼앗았기 때문이 아니라, 남보다 뛰어난 자신의 능력을 자유롭게 드러냈기 때문이다.
프로크루스테스가 사람을 침대에 맞췄다면 『해리슨 버저론』의 국가는 사람을 평균에 맞췄다. 한쪽은 침대 밖으로 나온 다리를 잘랐고, 다른 한쪽은 평균 밖으로 나온 재능을 잘랐다. 시대와 방법은 달라도 인간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의 기준에 모두를 맞추려는 발상은 같다.
이 소설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민주사회의 두 핵심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정치적 성향을 구분하는 기준 가운데 하나도 이 두 가치 중 어느 쪽을 상대적으로 더 중시하느냐에 있다. 일반적으로 보수는 개인의 자유와 자율, 시장 기능을 더 강조하고, 진보는 사회적 평등과 분배 정의를 더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어느 쪽도 자유나 평등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차이는 그 무게의 균형점을 어디에 둘 것인가에 있다.
평등은 자유 못지않게 소중한 가치다. 누구나 법 앞에서 평등해야 하고 출신이나 재산 등을 이유로 부당하게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 경제적·사회적 여건 때문에 출발선에조차 서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를 바로잡는 것도 공동체의 역할이다.
그러나 기회의 평등과 결과의 획일화는 구별할 필요가 있다. 사람마다 재능과 노력, 선택이 다른데도 모든 결과를 똑같이 만들려 한다면 결국 누군가의 자유를 제한해야 한다. 『해리슨 버저론』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에게 가장 무거운 쇳덩이를 달아야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더 노력해도 더 얻을 기회가 없고, 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마음껏 발휘할 수 없다면 사람들은 도전할 이유를 잃는다.

이 문제는 소설 속 미래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등수가 낮은 학생들을 위해 상을 폐지하거나 아예 등수를 매기지 않는 것은 일례에 불과할 정도다. 사회통합을 해치는 격차를 줄이고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제도는 필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개인의 선택과 자율, 노력에 따른 정당한 성과까지 지나치게 제한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한다. 물론, 반대로 자유로운 경쟁이라는 이유로 기울어진 운동장을 방치하거나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마저 외면한다면 자유는 강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으로 변질될 수 있다.
법은 결승선을 맞추는 도구가 아냐
법의 역할도 마찬가지다. 법은 사람을 같은 크기로 만드는 도구가 아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공정한 규칙 아래 각자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다. 출발선의 부당한 차별을 없애는 것은 법의 역할이지만, 결승선에 모두를 동시에 들어오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법이 사람의 다양성을 보호하지 않고 하나의 결과를 강요하기 시작하면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더 이상 신화 속 이야기만은 아닐 수 있다.동양에는 비익조(比翼鳥)라는 상상의 새가 있는데, 암수 각각 한쪽 눈과 한쪽 날개만을 가지고 있어 둘이 몸을 맞대야만 날 수 있다고 한다. 어느 한쪽만으로는 아무리 힘껏 날갯짓을 해도 하늘을 날 수 없다.
자유와 평등도 이 비익조의 두 날개와 닮았다. 자유라는 날개만으로 날려고 하면 사회는 경쟁에서 뒤처진 사람을 외면하기 쉽다. 반대로 평등이라는 날개만 크게 만들면 개인의 자유와 창의, 도전이 위축될 수 있다. 한쪽 날개가 아무리 크고 강해도 새는 제대로 날 수 없다.
프로크루스테스는 사람의 다리를 잘랐고, 『해리슨 버저론』의 국가는 사람의 재능을 잘랐다.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것은 평등 그 자체가 아니라 평등이라는 선한 가치가 절대화되어 자유라는 다른 가치를 집어삼키는 순간이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는 사람을 침대에 맞추는 체제가 아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 다른 모습 그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자유를 보장하면서도 누구도 부당하게 출발선 밖으로 밀려나지 않도록 평등을 지켜주는 체제여야 한다. 자유와 평등은 서로 싸워 한쪽이 이겨야 하는 가치가 아니라 함께 날아야 하는 비익조의 두 날개다. 두 날개가 함께 힘차게 펼쳐질 때,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도 더 높이, 더 멀리 날아갈 수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