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도체를 비롯한 AI 인프라 기업들이 질주하는 동안 소프트웨어주는 시장에서 철저히 소외됐습니다. 지난해 8월부터 올 1분기까지 S&P 500이 4.6%, 반도체 ETF가 38.5% 상승하는 동안 미국 대표 소프트웨어 ETF IGV는 26.3% 하락했습니다. 개별 주가를 보면 더 극적입니다. 마이크론은 이 기간 222%, 샌디스크는 1440% 폭등했는데, 마이크로소프트는 30%, 서비스나우는 43% 급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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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아무리 발전해도 모든 소프트웨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기업의 고유 데이터 관리, 사이버 보안, 신원 인증, 권한·책임·컴플라이언스 등을 담당하는 인프라 층의 소프트웨어는 AI가 쉽게 우회하거나 대체할 수 없습니다. 기존 SaaS 기업들도 AI를 도입해 진화한 제품과 서비스를 내놓는 데 주력했습니다.
'펀더멘털에 비해 주가 하락이 과도하다'는 바닥론이 때 되면 돌아왔지만, 반등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실적이 아직 받쳐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기술주 투자자문사 퓨처럼그룹의 셰이 볼루어 수석 전략가는 지난 1월 "누가 가격 결정력을 갖는지에 대한 명확한 그림이 나오기 전까지는 밸류에이션이 억눌린 채 소프트웨어는 유배된 섹터처럼 거래될 것"이라며 "여러 분기에 걸쳐 증명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소프트웨어로 자금이 돌아오는 시기는 2027년이 될 것"이라고 했었지요. (※참고 "현실판 AI 비서 자비스까지"…소프트웨어의 끝없는 추락 [빈난새의 빈틈없이월가])
사모펀드의 대규모 소프트웨어 베팅
그런데 최근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습니다. 올 2분기 역대급 실적과 연간 가이던스 상향을 발표한 팔란티어와 애틀래시안의 주가가 하루 만에 각각 30%, 35% 급등한 것이 첫 번째였는데요. 13일(미국 동부시간)에는 보다 상징적인 이벤트가 있었습니다. 운용자산 1000억달러가 넘는 테크 전문 사모펀드 실버레이크가 소프트웨어 기업 워크데이 인수를 검토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온 것입니다.ADVERTISEMENT

워크데이는 인사·재무관리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시가총액 430억달러짜리 기업입니다. 지난 1년간 AI로 기존 사업이 잠식될 가능성이 높은 소프트웨어 기업을 논할 때 자주 거론됐던 기업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기업을 수백억달러를 들여 통째로 사겠다는 투자자가 등장한 겁니다. 성사되면 소프트웨어 업계 사상 최대 규모의 딜이 될 만한 뉴스입니다. 이 소식에 워크데이는 18% 폭등했고 몽고DB 클라우드플레어 팔란티어 세일즈포스 등 다른 소프트웨어주까지 일제히 뛰었습니다. IGV는 하루만에 3.1% 올라, 연초 대비 드디어 수익률이 플러스(+0.56%) 구간에 진입했습니다.
월가에선 이번 반등이 단순히 워크데이에 '인수 프리미엄'이 붙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고 평가합니다. 기술주 투자자로 유명한 댄나일스인베스트먼트의 댄 나일스가 대표적입니다.
나일스는 이 소식이 "당분간 소프트웨어 섹터 주가에 하방 지지선을 만들어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연말까지 소프트웨어 주가 상승률이 S&P 500보다 더 높을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주식시장의 투자자는 오늘 워크데이를 샀다가도 매수 논리가 틀린 것 같으면 내일 바로 다시 팔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업을 사들이는 사모펀드는 다릅니다. 우선 인수 과정에서 막대한 부채를 동원합니다. 판단이 틀렸을 때 져야 하는 위험이 훨씬 더 크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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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뿐 아니라 한 번 기업을 인수하면 통상 5~7년을 보유하면서 가치를 끌어올려 더 높은 값에 매각해야 수익을 낼 수 있습니다. 지금처럼 장기 차입 비용이 거의 20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이라면 그 문턱은 더 높아집니다. 거래 규모도 만만치 않습니다. 딜이 성사된다면 실버레이크가 참여했던 약 550억달러 규모의 일렉트로닉아츠(EA) 인수와 맞먹는 초대형 거래입니다.
결국 실제 성사되든 아니든, 실버레이크가 워크데이 인수를 실제로 검토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메시지가 될 수 있습니다. AI가 훨씬 발전할 5~7년 뒤에도 워크데이의 기업가치가 남아있을 수 있다는 데에 까다로운 사모펀드가 베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1년 가까이 엄청난 밸류에이션 축소를 겪은 소프트웨어 섹터를 이제 다시 봐야할 때가 왔다는 게 나일스의 주장입니다.
'소프트웨어 무차별 매도'에 균열
물론 '사스포칼립스' 공포가 완전히 끝났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나일스도 오픈AI, 앤스로픽 같은 'AI 네이티브' 기업들이 앞으로도 기존 소프트웨어를 계속 압박할 것으로 봅니다. 그는 "올 초 290억달러 수준이었던 두 회사의 합산 연환산매출(ARR)은 현재 1000억달러 이상으로 증가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했습니다. ADVERTISEMENT
특히 독점적 데이터를 보유하지 않은 단일 기능 소프트웨어나, 직원 수에 따라 과금하는 형태의 소프트웨어 등은 여전히 위험합니다. 그러나 인사·재무·고객 데이터를 쥐고 있는 ‘시스템 오브 레코드(System of Record)’ 소프트웨어, 보안·신원 관리처럼 AI 에이전트도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제 지점, 독점 데이터를 보유한 플랫폼의 가치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시장도 실제로 AI를 이용해 성장하는 기업과 그렇지 못한 기업을 구분해 주가에 차별적으로 반영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소프트웨어를 똑같이 피해주로 취급했던 무차별적인 디레이팅에는 앞으로 제동이 걸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반도체와 AI 인프라·하드웨어 기업에 쏠렸다가 지난 7월 급락을 겪은 투자자들도 마침 확산의 수혜를 볼 수 있는 다음 테마를 찾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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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일스는 "소프트웨어 섹터는 지난해 10월 고점을 찍은 이후 엄청난 상대적 부진과 밸류에이션 멀티플 축소를 겪었다"며 "지금부터 연말까지는 소프트웨어 섹터가 상대적으로 시장을 웃돌 가능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핵심은 소프트웨어의 AI 리스크가 사라졌다거나, 이제 반도체·하드웨어는 끝났고 소프트웨어가 반등할 것이라는 이분법이 아닙니다. AI 시대에 맞는 경쟁력을 입증하는 기업에 대해서는 소프트웨어여도 자금을 투입할 수 있다는 쪽으로 월가의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1년간 가장 철저히 외면받았던 소프트웨어가 다시 월가의 투자 후보군에 올라오기 시작한 이유입니다.
빈난새 기자 binther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