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트남에 갈 때 가진 돈이 딱 1만달러였습니다. 그 돈이라도 있으면 다시 시작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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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생, 올해 만 59세. 베트남에 자리를 잡은 한 성공한 사업가는 20여년 전 비행기에 몸을 싣던 때를 이 같이 회상했다. 지금은 연 매출 9000만달러 규모의 대형 물류기업을 이끌지만, 그때 그의 삶은 벼랑 끝에 몰려 있었다. 20대 중반에 처음 입사한 회사는 9개월 만에 부도가 났고, 이듬해 말 창업한 1인 무역회사는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의 파도를 고스란히 맞았다. 1999년엔 임신 중인 아내가 크게 아파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그렇게 30줄로 접어들었다. 이제 한국에선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베트남 기반의 종합물류회사인 PTV 그룹의 최분도 회장 얘기다. 회사 주력사업은 화주를 대신해 배송의 모든 과정과 국제 운송을 조율하고 관리하는 프레이트포워딩이다. 이젠 사업가에 더해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민주평통) 아시아·태평양지역회의 부의장이란 직함도 가질 정도로 성공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그의 삶은 막다른 골목이었다. 그가 베트남으로 향한 날짜를 2002년 10월 31일이라고 또렷하게 기억하는 이유다.
공부보다, 빨리 성공하고 싶었다
최 회장은 스스로를 ‘완전한 서울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고, 어린 시절 대부분을 서울에서 보냈다. 다만 그의 아버지는 달랐다. 터널과 도로를 만드는 건설기술자였던 아버지는 기술은 뛰어났지만 사업 욕심도 커서, 사업을 시작했다가 실패하면 다시 건설회사에 취직하는 일을 반복했다. 중동 건설 붐이 한창이던 시절에는 사우디아라비아와 리비아, 쿠웨이트 등 해외 현장을 오가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ADVERTISEMENT
최 회장은 “어머니는 그런 삶을 보며 자식들만큼은 안정적인 직장을 갖기를 바랐다”고 말했다. 하지만 형제의 길은 달랐다. 동생은 1988년 서울대에 차석으로 입학할 정도로 공부를 잘했지만, 최 회장 자신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 공부로는 동생을 따라갈 수 없다는 생각에 ‘빨리 자리를 잡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고 한다. 그는 스스로를 “어린 시절 인정 욕구와 콤플렉스가 컸던 사람”이라며 “어쩌면 사업은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회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1993년 한 중소기업에 취직, 소방설비 수출을 맡았지만, 회사는 입사한 지 9개월 만에 부도가 났다. 대부분의 직원이 새로운 직장을 찾아 떠날 때 그는 ‘회사가 망했을 뿐, 제품의 경쟁력은 괜찮다’는 생각에 창업을 택했다. 1인 무역회사를 차리고 베트남 국영 석유기업에 소방설비를 납품하는 계약을 따내는 성과도 거뒀다. 그는 해마다 한두 차례씩 베트남으로 오가기 시작했다.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던 사업은 1997년 IMF 외환위기로 송두리째 흔들렸다. 설상가상 1999년에는 아내가 병원 신세를 지게 됐다. 최 회장은 그 시기를 인생의 가장 큰 전환점으로 꼽는다. 그는 “삶을 대하는 가치관이 정말 많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다행히 아내는 수술을 이겨냈고 아이도 건강하게 태어났지만, 하지만 한국에서 다시 사업을 일으킬 자신은 남아 있지 않았다. 당시 나이는 30대 초반. 새 회사를 세우기도, 대기업에 취직하기도 애매한 나이였다. 당시 대기업 대부분은 신입 공채 중심이었다. 그가 사업을 정리하고 남은 돈 1만달러를 들고 베트남으로 간 이유다.
‘왜 하필 베트남이었느냐’는 물음에 그는 “이 나라는 반드시 성공할 것 같았다”고 했다. 2000년 전후 베트남은 지금 같은 세계의 생산기지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베트남을 택한 것은 그 나라의 ‘교육열’ 때문이었다. 최 회장은 “1995년부터 업무 때문에 1년에 한두 번씩 베트남에 갔는데, 그 가난한 살림에도 조그만 보습학원 앞에 자녀를 데려다주려는 오토바이가 바글바글했다”고 말했다. 공동체 질서를 준수하는 문화와, 똑같이 전쟁을 겪고도 경제가 발전한 한국을 보면서 ‘우리도 할 수 있다’라는 생각을 갖는 모습도 최 회장의 마음을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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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교육열을 보고 간 베트남에서 최 회장이 제일 먼저 겪은 것은 ‘사기’였다. 당시 베트남은 봉제산업이 호황이었는데, 현지 교민이 “봉제공장에서 사용하는 자수기계 두 대를 사서 임대하면 매달 2000달러 넘는 임대료를 받을 수 있다”는 말에 넘어갔다. 최 회장은 5만달러를 빌려 기계 두 대를 구입했다.

처음 한 달은 실제로 약속한 돈이 들어왔다. 최 회장은 안심하고 한국 출장을 떠났다. 그러나 돌아온 그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창고는 비어 있었고, 자수기계 두 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성당에서 알게 된 한 교민 사업가가 수소문 끝에 기계를 찾아내 돈을 일부라도 회수했지만, 베트남으로 들고온 돈은 그렇게 다 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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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상가상, 2003년이 되자 중국산 소방설비가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중국산 제품의 가격은 자신이 만드는 원가보다도 낮았다. 사업을 접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상황에서 그의 인생을 바꾼 것은 앞서 실패한 무역사업이었다. 그는 사업 과정에서 불편했던 점을 사업화하기로 했다. 그가 보기엔 베트남에서 물건을 보내고 받는 과정이 너무 비효율적이었다. 물류는 대부분 수작업으로 처리됐고, 화물이 언제 도착할지조차 장담할 수 없었다. 최 회장은 “‘이 서비스를 내가 하면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면서 “한국 기업들이 원하는 수준의 물류 서비스를 만들면 승산이 있다고 봤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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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최 회장은 2004년 8월 18일 지금의 PTV 그룹을 베트남 호찌민에서 직원 두 명과 함께 시작했다. 하지만 도시 외곽 건물에 사무실을 둔 신생 기업을 ‘안정적인 직장’으로 보는 베트남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어렵게 채용한 직원도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를 떠나는 일이 반복됐다. 최 회장은 결국 ‘이러다간 죽도 밥도 안 되겠다’는 생각에 호찌민 중심가의 오피스빌딩으로 터를 옮겼다. 주변에서는 “회사 규모도 작은데 무슨 오피스빌딩이냐”는 뒷말이 많았지만, 그때부터 직원 채용과 관리가 수월해졌다. 그는 “사무실은 비용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 사람을 모으는 투자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몇 년 뒤에는 또 한 번 주변을 놀라게 하는 선택을 했다. 2010년부터는 국내 해운사 출신 차·부장급 인력을 임원으로 영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베트남 현지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한국인 한 명의 인건비면 현지 직원 여러 명을 채용할 수 있었다. 중소기업이 한국인 임원을 여럿 두는 것은 당시로선 파격이었다. 하지만 그는 서비스업일수록 경험 많은 사람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고객 대부분이 한국 제조기업인 만큼, 한국 기업의 의사결정 방식과 요구를 이해하는 인력이 경쟁력이 될 것이라고 봤다. 이 선택 역시 회사 성장의 밑거름이 됐다고 그는 돌이켰다.
'김정은 루트' 따라 72시간 '긴급수송'...회사를 알렸다
회사의 전환점이 찾아온 건 2008~2009년 무렵이었다. 베트남에 대규모 투자를 추진하던 한국 대기업의 실무자로부터 간단한 요청이 들어오면서였다. 물류업체를 선정해야 하는데, 비록 10년 넘게 거래해온 업체가 파트너로 사실상 내정돼 있지만 경쟁입찰의 형식이라도 갖출 겸 ‘PTV가 입찰 형식만 맞춰달라’는 내용이었다. 최 회장은 “이 기업이 훗날 '부스러기'(남는 물량)이라도 맡겨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그래도 최선을 다했다”고 말했다.직원들과 함께 프레젠테이션을 꼼꼼히 준비한 그에게 예상 밖의 일이 벌어졌다. 자리에 참석한 한국인 임원이 뜬금없이 베트남 구매 담당자들에게 평가를 맡긴 것이다. 내정자가 있는 줄 몰랐던 현지 직원들은 만장일치로 PTV를 가장 높은 점수로 평가했다. 철저히 준비한 제안서와 현장 대응 능력이 경쟁사를 앞섰다. 최 회장은 “처음부터 계약을 따낼 생각은 하지 못했다”며 “운도 많이 따랐다”고 말했다.

최 회장과 PTV의 이름을 업계에 각인시킨 사건은 3~4년 뒤에 벌어졌다.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 대기업 공장에 비상이 걸렸다. 중국에서 들여오는 핵심 화학 원료가 제때 도착하지 않으면 생산라인 전체가 멈추는 상황이었다. 공장이 멈추면 하루 손실만 60만~70만달러. 남은 시간은 단 72시간이었다.
비행기는 위험물이라 사용할 수 없었고, 선박은 이미 늦었다.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중국 국경에서 육로로 화물을 끌고 오는 것. 중국 핑샹에서 베트남 랑선 국경을 거쳐 육로로 운송하는 우회 노선을 이용하기로 했다. 2019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미북 정상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이용한 루트와 유사하다.
최 회장은 옷 한 벌만 들고 랑선으로 갔다. 현장을 확인한 그는 직감적으로 불안했다. 탱크로리를 끄는 트럭 상태가 너무 낡아서다. 그는 승용차를 한 대 빌려 화물트럭 뒤를 따라갔다. 아니나 다를까 트럭은 가는 길에 일곱 번이나 멈춰섰다. 최 회장은 운전기사와 함께 트럭을 수리하고 다시 출발하기를 반복했다. 사흘 동안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한 채 트럭만 쫓아다닌 끝에 화물은 생산라인이 올스톱되기 3시간 전 가까스로 도착했다.
직원들이 먼저 '월급 절반으로 깎겠다' 제안..."사업은 사람 장사더라"
최 회장은 “그 일 이후 업계에 소문이 났다”면서 “'PTV에 맡기면 끝까지 책임진다'는 이야기가 퍼졌다"고 말했다.2020년 본격적으로 터진 코로나19도 회사의 운명을 가른 순간이었다. 호찌민에서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가는 컨테이너 운임이 1500달러 안팎에서 2만달러를 넘어설 정도로 치솟았다. 구조적으로는 물류회사에 큰 사업 기회지만, 문제는 자금이었다. PTV 그룹 같은 물류회사는 화주에게 돈을 받기 전에 먼저 자기 돈으로 선사에 운임을 지급해야 하는데, 운임 자체가 감당할 수 없게 치솟으면서 비즈니스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최 회장은 이때를 가장 잊지 못한다. 현지 직원들이 먼저 자신을 찾아와 “당분간 월급을 절반만 받겠다”고 한 것. 회사가 버텨야 직원도 살아남는다는 것을 직원들이 먼저 이야기한 셈이다. 직원들의 희생에 더해 한국계 은행이 유동성을 제공하면서 회사는 단기적인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회사가 안정을 되찾자 그는 삭감했던 급여를 모두 돌려주고 별도 보너스도 지급했다.
20여 년 전 직원 두 명으로 시작한 PTV 그룹은 이제 베트남 현지 직원 197명, 한국인 직원 13명 등 210여 명이 일하는 종합물류기업으로 성장했다. 물류를 중심으로 창고 운영과 육상운송, 통관, 벌크선 대리점, 보험대리점(GA), 포장이사, 철강 무역 등으로 사업을 넓혔다. 연 매출은 8500만~9000만달러 수준이다.
최 회장은 “사업은 결국 사람 장사”라고 말한다. 자수기계 사기를 당했던 날도, 72시간 동안 트럭을 따라 달렸던 날도, 코로나19를 버텨낸 순간도 결국 사람 때문에 무너졌고 사람 덕분에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경영의 1순위는 사람이다. 최 회장은 직원들을 한국으로 꾸준히 보내 물류 현장을 직접 경험하도록 했다. 베트남 공무원과 직원들을 대상으로는 인하대학교 물류전문대학원 석·박사 과정을 지원했다. 그 결과 박사 2명과 석사 6명이 배출됐다. 석사 과정을 마친 직원 가운데 한 명은 현재 회사의 회계 책임자로 일하고 있다. 회사 전 직원과 4년에 한 번씩 해외 연수를 가기도 한다. 최 회장은 “비행기를 처음 타는 직원들도 많은데, 그들에겐 내가 첫 해외여행을 경험시켜주는 것”이라며 웃었다.
베트남 교민사회를 위한 활동에도 많은 시간을 쓴다. 현재는 세계한인경제무역협회(월드옥타)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후배 기업인들을 돕고 있다. 청년 창업과 사회공헌 활동에도 꾸준히 참여한다.

최 회장은 끝으로 “해외에서 사업에 성공한다는 것은 혼자만의 힘으로 이뤄지는 것이 절대 아니란 점을 명심해달라”고 당부했다. 그는 “나 역시 지역·교민사회, 베트남 직원들의 도움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강조했다. 최 회장이 현지의 한국인 학교 이사장, 베트남 한인 상공인 연합회(코참), 세계한인경제무역협회(월드옥타) 수석 부회장 등 자리를 맡은 이유다. 최 회장은 “돈을 버는 것보다, 그 가치를 잘 나누고 새 가치를 창출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해외에서 한국인을, 혹은 한국인끼리 서로 불신하는 문화도 안타까워했다. 최 회장은 유대인과 화교 사회를 예로 들었다. 유대인은 수천년, 화교도 1000년 넘게 해외에서 활동하면서 공동체를 만들었는데, 이와 비교하면 한국인은 해외 진출 역사가 길지도 않은데도 이만큼이나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도 해외에서 서로 키워주고 보살피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면서 “2세대 경영인이나, 차세대 청년들에게도 강의나 모임을 만들어주면서 ‘함께하는 문화’를 전달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광식 기자 bumer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