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DVERTISEMENT
영국인에게 유머는 단순히 가벼운 농담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유머는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수준을 드러내는 지표이기도 하고, 말을 할 때 갖추어야 할 격식이자 소양이기도 하다. 즉, 영국에서 유머는 의사소통 방식의 일부이다. 영국 영화에서 휴 그랜트가 실없는 농담을 계속하는 이유도 특별히 재미있게 보이려고 해서가 아니라, 위트가 영국 문화의 일부이고, 그것이 영국식 영어에 자연스럽게 배어 있기 때문이다.
농담하는 방식도 여러 가지다. 비가 주룩주룩 오는 날에 '오늘 날씨가 참 좋네요(very lovely)'라고 무심하게 반어법으로 한 마디 툭 던지는 방식도 있고, 부조리한 사회적 상황을 건조하게 풍자하는 블랙 유머도 자주 들을 수 있다. 그런 문화적 배경 때문인지, 국제중재 심리기일에서도 영국계 중재인들이나 영국 변호사들이 가벼운 농담을 하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특별히 이목을 끌려고 하기보다, 그들에게 이와 같은 화법이 몸에 밴 것이다.
ADVERTISEMENT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고 했던가. 우리도 심리기일에서 과하지 않은 농담을 건네면, 중재인들이 마음을 빨리 열고 우리 말에 귀를 기울였던 경우를 여러 번 경험하였다. 문화적인 주파수가 서로 맞추어져서 더욱 원활한 교감을 이루었다. 국제중재 사건에서 언어가 무기라면, 그 언어의 날을 더 뾰족하게 하는 숫돌은 유머가 아닌가 싶다.
뻔뻔한 펀(pun)의 세계, 언어유희의 묘미

영국인들이 10분에 한 번씩 하는 것이 말장난, 영어로 펀(pun)이다. 제미나이(Gemini)에 말장난 예시를 하나 알려달라고 하니 '바나나를 먹으면 나한테 반하나, 오렌지 먹은 지 얼마나 오랜지'를 알려준다. 실제 중재 사건에서 주고받는 유머는 이보다 조금 더 세련됐다.
몇 년 전에 교량 건설에 관한 국제중재를 수행하였다. 중재인 세 명 모두 영미권에서 활동하는 원로 변호사였다. 우리 의뢰인이 한국 시공사였는데, 상대방 외국 발주처가 다 지은 교량에 하자가 많다며 손해배상청구를 제기하였다. 우리측은 심리기일 모두진술 때 여러 가지 쟁점들을 다루었다. 한 주제에서 다음 주제로 넘어갈 때 각 이슈가 서로 관련성이 있으니 연결(bridge)해서 설명을 해보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의장중재인이 '내가 bridge 언어유희를 더 먼저 하려고 했는데, 당신들이 한발 빨랐네요'라면서 웃으며 한마디 했다. 의장중재인도 말장난, 즉 펀(pun)을 벼르고 있었고, 다리 분쟁에서 다리 비유가 언젠가는 나오겠지 생각했는데, 이렇게 초반에 한국 변호사팀이 말장난을 먼저 할 줄 예상을 못한 듯 싶었다. 우리는 작은 성의를 알아줘서 고맙다는 눈짓만 건네며, 크게 반응하지 않고 미소를 짓기만 했다.
이런 식으로 사건의 주요 쟁점을 과하지 않게 유머로 승화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대형 M&A 분쟁에서 당사자들의 계약상 최선 노력 의무가 문제 되었던 사건이 있었다. 중재인이 반대신문이 대략 몇 분 남았는지 물어보자 '저희도 지금 최선의 노력(best efforts)을 다하고 있습니다. 증인이 얼마나 협조하는지에 따라 점심시간이 언제 시작할지 달라질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 단순 농담 같지만, 증인이 반대신문 과정에서 우리 묻는 말에 간결하게 답변하라는 압박성 메시지이기도 했다.
또 한 번은 우리 의뢰인이 구입한 기계에서 용접 후 열처리(heat treatment)가 제대로 되었는지를 기술적으로 다툰 사건이 있었다. 심리기일이 한참 진행 중인데 중간에 심리실 에어컨이 꺼졌다. 우리 측에서 '지금 다 같이 열처리가 되는 것 같네요'라고 한 마디를 건네니, 중재판정부가 피식 미소를 지었던 기억이 난다.
ADVERTISEMENT
몇 년 전 이차 전지 제작업체가 제기한 국제중재 사건에서 있었던 일도 기억난다. 심리기일 3일 차에 다들 지쳐가던 무렵, 마이크의 전원이 꺼졌다 켜졌다 하는 일이 벌어졌다. '우리 모두 슬슬 밧데리가 떨어지는 것 같네요'라고 우리측에서 농담했다. 이차 전지 사건에서 배터리 관련 농담이 나올 거라고 모두가 예상했는지, 상대방 변호사를 포함해서 다들 미소를 지었다. 이후 그날 일정이 별 탈 없이 잘 마무리되었다.
중요한 문서를 잘 기억시키는 방법

국제중재 사건에서 전체적인 스토리는 집의 설계 도면에 견주어 볼 수 있다. 그만큼 전체 프레임을 잘 잡는 것이 중요하다. 한편, 디테일을 채우는 것도 못지않게 중요한데, 그 역할은 증거가 한다. 즉 증거는 집을 지을 때 콘크리트가 하는 역할과 비교할 수 있다. 증거가 약하면, 아무리 프레임이 훌륭해도 집을 지을 수가 없다.
증거 중에서도 결정적인 문서 한두 개가 사건의 결과를 좌우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십여 년 전에 국제중재 심리기일에서 있었던 일이다. 우리 의뢰인은 한국 시공사이고, 상대방은 중앙아시아에 있는 발주처였다. 고층 건물을 짓는 프로젝트였는데, 공사 초반부터 발주처가 별 이유 없이 대금을 미지급하였다. 우리 의뢰인은 참고 참다 계약을 해지하였다. 이 사건에서 발주처가 시공사에 '우리 자금 사정이 어려우니, 기성금을 줄 재원이 없다'는 3월 15일 자 공문을 보냈는데, 그 공문의 의미가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우리 팀의 시니어 변호사가 모두진술에서 다음과 같이 포문을 열었다. '저는 3월 15일이라는 날짜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잊어서도 안 됩니다. 제 아내의 생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3월 15일 자 공문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 공문의 내용을 같이 한 번 살펴볼까요?' 주니어였던 나는 변론을 위해 가족 생일까지 언급해야 하나 싶었다. 분명히 모두진술 원고에 이 내용은 없었기 때문이다.
ADVERTISEMENT
그날 저녁 식사를 하면서 '변호사님, 오늘 낮에 핵심 서증 날짜 말씀하신 것 - 정말인가요? 저는 몰랐던 내용이라서요.'라고 말씀드렸더니, 정말이라고, 그걸 의심했냐고 하면서 시니어 변호사님이 웃으시며 반문하셨다. 그 덕에 나도 오늘까지 사모님 생신을 기억하고 있다. 심리기일 당시 중재인들이 부담스럽지 않게 살포시 웃은 것은 물론이다. '배우자의 생일을 잊었다가는 큰일 난다'는 점은 만국 공통이었다.
유머는 의사소통의 윤활유

과유불급. 모든 것은 과하면 모자람만 못하다. 국제중재 심리기일이 유머 경연장은 아니다. 반대로 엄숙하게 법률요건과 사실관계만 나열하면 하려던 이야기가 충분히 전달되지 않을 수도 있다. 중재인도 사람이다 보니 건조한 변론만 듣다 보면 지루하다고 느낄 수 있다. 비빔밥을 맛있게 차렸는데 기왕이면 참기름 한 스푼으로 그 맛을 완성하면 좋듯이, 센스 있게 웃음 포인트를 하나씩 주면 메시지가 더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 있다.
'
그런데 유머는 대본을 미리 준비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듣는 사람에게 친숙한 내용을 전달하되, 마지막에 약간의 의외성을 가미하면 그것이 농담이 된다. 그 의외성은 단어의 원래 뜻을 살짝 비틀 때 나오기도 하는데, 그 효과를 배가하려면 타이밍을 잘 맞추는 것이 필요하다. 웃음 버튼을 누르는 타이밍은 미리 준비한다고 맞출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행히 한국인은 언어유희에 능하다. 해학 없이 못 사는 민족이라 그런지 한국 사람도 영국인 못지않게 말을 재미있게 하는 능력이 대체로 좋다. 국제중재 심리기일에서 밉지 않게 농담을 구사할 수 있으면 금상첨화이다. 사실 영어가 모국어인 변호사 중에서도 한없이 심각하기만 하고 세련된 농담을 못 하는 사람도 꽤 있다. 유머는 외국어 실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말 센스에서 온다. 눈치 빠른 한국 중재 변호사들이 국제중재 사건에서 승률이 높은 데에는 우리 몸에 밴 재치도 한몫하지 않나 생각해본다.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