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공지능(AI)이 사람처럼 생각하는 시대가 열렸지만 현실에서 일하는 휴머노이드는 ‘몸’이라는 또 다른 장벽을 넘어야 한다. 아무리 뛰어난 AI를 탑재해도 몸이 무겁거나 배터리가 오래 버티지 못하거나 충격에 쉽게 파손된다면 산업 현장에 투입하기 어렵다.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핵심 하드웨어가 바로 ‘골격’과 ‘에너지(배터리)’ 기술이다. 피지컬 AI 시대를 앞두고 휴머노이드의 골격과 에너지 기술이 새로운 경쟁 무대로 떠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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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백 g’이 좌우하는 휴머노이드 경쟁력
휴머노이드는 사람처럼 두 다리로 걷고, 물건을 들고, 계단을 오르며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는 동작도 반복해야 한다. 이 모든 움직임을 가능하게 하는 기반이 바로 골격이다. 골격은 내부 부품을 지탱하는 프레임이 아니라 로봇의 운동 성능과 내구성, 에너지 효율을 좌우하는 핵심 하드웨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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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머노이드의 골격은 자동차보다 훨씬 까다롭다. 자동차는 바퀴가 차체 하중을 지탱하지만 휴머노이드는 두 다리의 관절이 몸 전체의 무게를 감당해야 한다. 팔과 다리 끝에 수백 g의 무게만 더해져도 관절에 걸리는 부하가 커지고 모터가 더 많은 힘을 써야 해 전력 소비가 늘어난다. 업계에서 ‘몇백 g이 상품성을 좌우한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휴머노이드 골격은 ‘강하면서도 가벼워야 한다’는 상반된 과제를 동시에 해결해야 한다. 반복되는 충격에도 변형되지 않아야 하고 모터와 배터리에서 발생하는 열도 효과적으로 분산해야 한다.
이 조건을 가장 먼저 결정하는 것이 소재다. 현재 휴머노이드 골격에는 알루미늄, 마그네슘 합금, 티타늄, 탄소섬유복합재(CFRP)를 대표적으로 활용한다. 어느 한 소재가 모든 성능을 만족시키는 것은 아니어서 부위별 특성에 맞춰 조합하는 방식이 일반적이다.
알루미늄과 마그네슘 합금은 가벼운 무게에 더해 전자파 차단 성능과 열방출(방열) 효율이 뛰어나 로봇 프레임과 관절을 감싸는 구조물(하우징)에 가장 널리 쓰인다. 티타늄은 극한의 강도와 내부식성이 뛰어나 하중이 집중하는 핵심 관절부나 발바닥 등에 필수적인 소재다. 다만 알루미늄이나 마그네슘에 비해 가공이 매우 까다롭고 원자재 가격이 비싸다. 꼭 필요한 부위에만 국소적으로 적용하는 설계 최적화가 업계의 주요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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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소섬유복합재는 강철보다 훨씬 가벼우면서도 티타늄급의 강도를 확보할 수 있어 로봇의 팔다리 무게를 극적으로 줄여줄 차세대 핵심 소재로 주목받고 있다.
일본 도레이(Toray)와 미국 헥셀(Hexcel)은 탄소섬유복합재 분야를 대표하는 기업이다. 이 두 기업의 고성능 탄소섬유는 이미 항공기 날개나 동체에 쓰이던 것으로, 최근 로봇 제조사들의 경량화 러브콜을 받고 있다. 도레이그룹은 지난해 10월 현대차그룹과 손을 잡기도 했다. 완성차를 넘어 로봇 등 미래 모빌리티에 쓰이는 첨단 소재와 부품 개발 협력을 강화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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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강도 알루미늄 가공 1위 기업인 미국 알코닉(Arconic)은 가격을 앞세우고 있다. 탄소섬유가 아무리 좋아도 가격이 비싸다. 알루미늄은 뼈대 중 상대적으로 하중을 많이 받거나 대량 양산이 필요한 부위에 필수적이다.
국내에선 효성첨단소재, 케이엔알시스템, 삼기 등이 로봇 경량화 소재·부품 국산화 흐름에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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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계에서는 휴머노이드 시장이 본격적으로 확대할 경우 항공기와 슈퍼카 중심이던 첨단 경량 소재 시장이 로봇 산업으로 빠르게 확장할 것으로 보고 있다. 전통적으로 고성능 탄소섬유와 고강도 알루미늄의 최대 수요처는 보잉·에어버스 같은 항공기나 전기차·슈퍼카였다. 하지만 테슬라의 옵티머스 등 수많은 휴머노이드 로봇이 대량 양산 궤도에 오르면 로봇 한 대당 들어가는 경량 소재의 양이 엄청나다. 소재 기업들에는 새로운 거대 블루오션 시장이 열리게 된다는 얘기다.
골격 경쟁은 소재를 넘어 생산 공정으로도 확산하고 있다. 현재 대부분의 휴머노이드는 생산량이 적어 컴퓨터수치제어(CNC) 가공 방식으로 제작한다. 하지만 향후 양산 체제로 전환하면 자동차산업에서 활용하는 다이캐스팅(통합 주조) 등 대량생산 공정이 확대할 것으로 업계는 전망한다. 복잡한 부품을 한 번에 제작해 제조 단가를 낮추고 생산 속도를 높일 수 있다.
중국의 엔진AI는 이미 항공우주 등급의 마그네슘-알루미늄 합금을 활용해 몸체 구조 전체를 일체형 다이캐스팅 공정으로 찍어내는 방식을 시도하고 있다. 이들은 15분마다 로봇 1대를 생산하는 라인을 구축하며 가장 공격적으로 다이캐스팅을 도입 중이다.
테슬라는 옵티머스 V3 등 양산형 프로토타입의 단가를 2만~3만달러로 낮추기 위해 자동차 부품용 다이캐스팅 인프라를 보유한 전문 제조사들을 밸류체인에 편입시키고 있다.
◆전기차와는 다른 로봇 배터리의 조건
골격이 휴머노이드의 움직임을 결정한다면 배터리는 로봇의 ‘체력’을 좌우한다. 사람처럼 걷고 계단을 오르내리고 물건을 들어 올리는 동작을 반복하려면 두뇌 역할을 하는 AI 반도체와 온몸에 배치된 수십 개의 관절 모터에 안정적으로 전력을 공급해야 한다. 하지만 휴머노이드에 필요한 배터리는 전기차와는 요구 조건이 다르다.
전기차는 넓은 하부 공간에 배터리를 깔 수 있다. ‘한 번 충전으로 얼마나 멀리 달릴 수 있는지’가 최대 경쟁력이다. 반면 휴머노이드는 인간의 몸통 정도밖에 되지 않는 좁은 공간 안에서 짧은 순간 엄청난 힘을 반복적으로 내야 한다. 가벼워야 하며 높은 에너지밀도는 물론 순간 출력과 급속충전 성능, 외부 충격에도 안전한 내구성을 동시에 확보해야 한다.
배터리 업계는 이 같은 까다로운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휴머노이드 환경에 최적화된 맞춤형 기술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현재는 단단한 금속 통으로 감싼 니켈·코발트·망간(NCM) 등 삼원계 계열의 ‘원통형 리튬이온배터리’를 휴머노이드에 탑재한다. 동글동글한 원통형 배터리를 촘촘히 묶으면 셀(배터리 낱개 한 개) 사이에 자연스러운 틈새가 생겨 바람이나 냉각수가 통하는 ‘열 식힘 통로(방열 구조)’ 역할을 한다. 이는 중국 업체들이 강점을 갖고 있는 리튬인산철(LFP) 배터리보다 무게가 가볍고 고출력 수요에 대응하면서 장시간 사용에 적합하다.
한국의 LG에너지솔루션은 고성능 원통형 삼원계 리튬 배터리를 앞세워 피겨AI, 보스턴다이내믹스, 테슬라 등 주요 로봇업체에 배터리 공급을 확대하고 있다. 로봇용 배터리는 전체 휴머노이드 가격의 5~10%를 차지하는 핵심 부품이다.

◆‘꿈의 배터리’ 선점하려는 K-배터리 3사
하지만 로봇 업계가 꿈꾸는 진짜 종착지는 따로 있다. 바로 배터리 내부의 흘러내리는 액체 전해질을 단단한 고체로 바꾼 ‘전고체 배터리’다. 전고체 배터리는 에너지 밀도를 높이고 작동 시간을 극적으로 늘릴 수 있어 휴머노이드에 가장 적합한 차세대 심장으로 꼽힌다.
배터리를 고체로 바꾸면 두 가지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난다. 우선 로봇이 넘어지거나 부딪혀 배터리에 구멍이 나도 내부에 흘러내릴 가연성 액체가 없어 폭발이나 화재 위험이 줄어든다. 폭발 위험이 사라지면서 단단하고 무거운 금속 통 대신 가볍고 얇은 ‘파우치 형태’ 필름으로 셀을 감쌀 수 있다. 화재 방지용 안전장치와 두꺼운 껍데기가 차지하던 공간을 싹 걷어내고 그 자리에 배터리 알맹이를 꽉꽉 채워 넣을 수 있어 크기는 기존과 같지만 체력(용량)이 늘어난다.
현재 보스턴다이내믹스의 휴머노이드 아틀라스는 약 3700Wh급 배터리로 최대 4시간가량 작동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약 전고체 배터리로 탑재할 경우 로봇의 전체 무게는 줄어들면서도 작동 시간이 지금보다 더 늘어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다만 실제 증가폭은 셀 성능과 시스템 설계에 따라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국내 배터리 3사는 모두 전고체 배터리를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육성하고 있다. 가장 적극적인 기업은 삼성SDI다. 삼성SDI는 2023년 국내 배터리 업계 최초로 수원연구소에 전고체 파일럿 라인을 구축한데 이어 최근 AI 로봇용 파우치형 전고체 배터리 ‘솔리드스택(SolidStack)’을 공개했다. 삼성SDI는 전고체 배터리를 적용하면 휴머노이드의 작동 시간을 최대 8시간 수준까지 늘릴 수 있을 것으로 보고 2027년 양산을 목표로 개발을 진행하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은 지난해 2월 전고체 전지의 단점이었던 충전 속도를 기존보다 10배 이상 높일 수 있는 신기술 개발을 발표했다. 전고체 배터리의 본격적인 상용화 시점은 삼성SDI보다 다소 늦은 2030~2035년을 목표로 한다. LG에너지솔루션 역시 자체 파일럿 라인을 가동 중이며 오는 2028년 ‘800Wh/L’급의 고분자계 전고체 배터리를 먼저 선보이겠다는 단계적 로드맵을 제시했다. 현재 전기차용 리튬이온배터리의 에너지밀도가 통상 600~700Wh/L 수준인 점을 고려하면 약 20~30% 높은 수준이다.
SK온 역시 지난해 9월 대전 미래기술원에 전고체 배터리 파일럿 플랜트를 구축하고 2029년 상용화를 목표로 연구개발을 진행 중이다. 우선 800Wh/L급 제품을 상용화한 뒤 장기적으로는 1000Wh/L 달성을 추진하고 있다.

김태림 기자 t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