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프'가 흥행하면 한국영화가 산다고요? 나한테 왜 이러나 싶어요."
영화 '호프'를 연출한 나홍진 감독에게 "제작비를 많이 쓴 만큼 흥행 부담감이 크냐"고 묻자 돌아온 말이다. '호프'는 개봉 첫 주에 100만 관객을 돌파했지만, 제작비를 뽑아내려면 흥행 돌풍은 상당기간 이어져야 한다.
'호프'의 순제작비는 500억원, 마케팅을 포함한 전체 제작비는 70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역대 한국 영화 최대 제작비다. 나 감독은 개봉을 앞둔 막바지까지 후반 색 보정 작업을 한 것으로 전해졌는데, 이 또한 제작비에 들어간다.
'호프'의 흥행은 코로나19 이후 침체에 빠진 한국 영화 산업뿐 아니라 투자배급사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모기업인 메가박스중앙의 기업회생과도 직결됐다는 점에서 시장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메가박스중앙을 비롯해 중앙홀딩스, JTBC, 콘텐트리중앙 등 중앙미디어그룹 5개 계열사가 지난달 12일 기업회생절차를 신청했고, 이후 중앙일보는 워크아웃에 들어갔다. '호프'는 메가박스중앙이 수년간 공들여온 텐트폴 작품이라는 점에서 업계 일각에선 "'호프'가 중앙미디어그룹의 '호프'(희망)가 될 지 지켜봐야 한다"는 반응을 내놓는다.
회생절차 신청 한 달 만에 개봉

'호프' 제작은 포지드필름스, 플러스엠, 웨스월드가 맡았고 배급도 플러스엠이 담당한다. 메가박스중앙이 회생절차에 들어간 지 한달 뒤인 이달 15일 '호프'는 극장에 걸렸다. 플러스엠은 '범죄도시' 시리즈, '서울의 봄' 등을 흥행시킨 대형 배급사지만, 지금은 힘이 빠진 상태다.
중앙그룹의 위기는 '호프' 한 작품으로 해결될 일은 아니다. 수십개 배급사들이 5월 초부터 6월 중순까지 메가박스에서 상영된 영화의 관람료 정산금을 받지 못하고 있어서다. 메가박스는 관객들이 낸 입장료를 보관한 뒤 영화 종영 45일 후 배급사에 정해진 비율대로 지급해야 한다. 하지만 5월 말 종영한 영화의 정산금을 아직도 돌려주지 못하고 있다. 미지급 정산금 규모는 15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메가박스중앙은 각 배급사에 보낸 공문을 통해 6월 14일까지 발생한 미지급 채권은 회생채권에 해당하며 향후 회생계획에 따라 변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특히 6월분 정산과 관련해서는 6월 1일부터 14일까지 발생한 정산금은 회생채권으로, 6월 15일부터 30일까지 발생한 정산금은 공익채권으로 분류해 세금계산서를 발행해 달라고 안내한 것으로 알려졌다.
영화인 연대는 지난 8일 "메가박스중앙 회생절차와 관련해 제작·수입·배급사 및 위탁상영 사업자의 미지급 정산금 문제가 영화산업에 중대한 불안 요인이 되고 있다"며 "관객이 낸 입장권 매출 중 제작·수입·배급사에게 돌아가야 할 정산금을 지급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영화산업의 제작·배급·상영 순환 구조와 직결된 문제"란 입장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호프'가 성공하면 분위기가 달라질 수도 있다"는 기대감도 깔려 있다고 영화계 관계자는 전했다.
한국 영화 사상 최대 제작비, 그 10년의 무게

'호프'는 나 감독이 2016년 '곡성' 이후 10년 만에 내놓는 신작이다. 1980년대 비무장지대 인근 어촌 마을을 배경으로, 호랑이 출현 소동을 계기로 정체불명의 외계 존재와 인간이 충돌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배우 황정민, 조인성, 정호연이 출연하고 마이클 패스벤더, 알리시아 비칸데르, 테일러 러셀 등 할리우드 배우들이 모션·페이셜 캡처로 외계인 캐릭터를 연기한다.
출연진만 화려한 게 아니다. 나 감독은 '호프'를 루마니아 레테자트 국립공원에서 찍었고, 전세계에 2개밖에 없는 최고급 렌즈를 독일에서 공수하기도 했다. '호프' 제작비가 직전 최대작인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4000만달러·당시 환율 기준 430억원)를 압도하게 된 배경이다.
'호프'는 탄탄한 스토리와 화면 구성에 모든 스턴트를 CG 없이 배우들이 직접 소화하도록 설계한 점 등이 높이 평가받아 제78회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됐고, 전 세계 200여개 국가 및 권역에 선판매됐다.
'호프'는 해외 판권 판매로만 제작비의 절반가량을 회수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럼에도 국내에서 700만명 이상을 동원해야 손익분기점을 넘어설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나 감독의 최고 흥행작 '곡성'(688만명)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얘기다.
영화진흥위원회가 발표한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자료에 따르면 '호프'는 지난 23일까지 개봉 일주일 만에 누적 관객 수 264만명을 동원하며 박스오피스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누적 매출액은 약 291억원이다.
오는 29일 개봉하는 영화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란 강적이 기다리고 있지만, '호프'를 찾는 발길은 상당기간 이어질 것이란 관측이 많다. 강한 호불호 때문에 직접 눈으로 확인하려는 수요가 많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시장의 관심사인 '호프'의 흥행을 메가박스중앙 회생과 엮는 건 억측이란 시선도 있다. '호프'의 흥행 수익이 메가박스중앙에 귀속되려면 배급 수익과 메가박스 상영 수익이 동시에 들어와야 하지만, 메가박스중앙은 회생절차에 들어간 만큼 법원이 자금을 관리하기 때문이다. 메가박스중앙에 돈이 들어가려면 채권단과의 협의, 변제 계획 수립 등 복잡한 절차를 거쳐 법원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증권가에서는 '호프'의 흥행이 콘텐트리중앙·메가박스중앙에 단기적인 주가 상승 모멘텀이 될 수는 있어도 회생절차라는 구조적 리스크를 이겨낼 수는 없다고 분석한다.
그럼에도 '호프'의 흥행이 갖는 상징적 의미는 적지 않다. 메가박스가 법정관리 중에도 정상 운영되고 있다는 신호를 시장에 보내는 것, 플러스엠이 여전히 작동하는 배급사임을 증명하는 것, 그리고 정산금을 받지 못한 배급사들이 메가박스와 협상 테이블에 앉을 여지를 만드는 것이란 점에서다. 숫자 이상의 효과가 '호프'의 흥행에 달려 있는 셈이다.
'호프'의 흥행이 침체된 국내 영화 투자·배급 시장에 활기를 불어넣을 것이란 기대감도 크다. 콘텐트리중앙이 발표한 2025년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영화 관람객 수는 콘텐츠 흥행 여부에 따라 큰 폭으로 변동하며, 영화산업은 경기 변동보다 콘텐츠 경쟁력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고 명시돼 있다. 이는 대형 흥행작 한 편이 업계 전반의 심리와 투자 환경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수 있다는 걸 시사한다.
하지만 상황이 녹록한 건 아니다. AI 투자 플랫폼 에픽AI의 분석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전국 극장 관객 수는 1억609만명으로 코로나 이전 대비 절반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하지만 극장 수는 2021년 542개보다 오히려 소폭 늘어난 547개였다. '호프'의 흥행이 영화시장의 공급 과잉과 수익성 악화 문제 해결에 얼마나 도움이 될 지 모든 영화업계 종사자들이 지켜보고 있다.
김소연 한경닷컴 기자 sue12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