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전력산업이 기이한 동맥경화에 걸렸다. 동해안의 원자력발전소와 화력발전소 등은 이미 지어놓고도 송전선로 부족으로 발전기를 강제로 멈춰세우고 있다. 반면 첨단 반도체 클러스터가 들어설 수도권에선 전력 부족을 호소한다. 이 모순을 해결할 유일한 해법으로 송전탑 추가 건설이 제시되지만, 이는 1차원적인 접근에 불과하다.현재의 전력망 위기는 설비의 절대적 부족 때문이 아니라, 경직된 전력망 운영 기준과 이를 둘러싼 제도적 모순이 빚어낸 인재에 가깝다. 우리나라는 주요 전력설비 2곳이 동시에 고장나도 정전 없이 전력을 공급해야 한다는 ‘N-2’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 도로에 비유하면 주요 간선도로 두 곳이 한꺼번에 끊겨도 교통이 마비되지 않도록 하는, 매우 엄격한 요구 수준이다.
영국과 미국은 주요 설비 1곳의 고장에 대비하는 ‘N-1’ 기준을 원칙으로 하고 있지만, 우리는 고립 계통을 고려해 기준을 강화한 것이다. 한국처럼 다른 나라와 전력망이 연결되지 않은 일본과 싱가포르도 N-1을 적용하되, 탄력적 운영으로 송전선 활용률을 높이는 것과 대조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기존 송전선로의 여유 용량마저 족쇄에 묶여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최고 수준의 안전 기준을 요구하면서도 그 비용은 지불하지 않는 것이다. N-2 체계를 유지하려면 천문학적인 송전망 투자 비용과 고단가 발전기 가동비용을 전기요금에 반영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정부는 물가 안정과 정치적 부담을 이유로 요금을 원가 이하로 철저히 통제해 왔다.
바로 이 엇박자가 전력망 투자 여력을 고갈시키는 부메랑이 됐다. 기존 송전망을 더 똑똑하게 운영하면 신규 송전선 건설 없이도 전기를 더 많이, 더 효율적으로 보낼 수 있다. 기술도 이미 충분하다. 문제는 제도다. 현행 정책은 전력망 운영을 맡은 한전과 전력거래소에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구조로 돼 있다. 새로운 기술 도입으로 효율을 높이더라도 얻는 보상은 거의 없다. 반면 만에 하나 사고라도 나면 모든 책임을 뒤집어써야 한다. 이런 환경에서 어떤 공무원과 엔지니어가 위험을 감수하고 새로운 운영 방식을 도입하겠는가.
이 매듭을 풀기 위해서는 투 트랙 개혁이 이뤄져야 한다. 먼저 안전조치를 취한 운영 주체에 고의·중과실이 없는 한 법적 면책을 보장하고, 전력망 안전 비용을 요금에 정당하게 반영해야 한다. 취약계층에는 에너지 바우처 등 사회 안전망과 병행하면 된다. 이렇게 제도의 족쇄를 푼 뒤 단기적으로는 신뢰도 기준을 탄력적으로 적용해 기존 송전망의 숨은 용량을 최대한 활용하고, 중장기적으로 수도권과 전력 대단지를 잇는 핵심 송전선로를 질서 있게 확충해 나가야 한다. 소프트웨어 개혁이 선행되지 않는 한 송전탑을 아무리 세워도 이 같은 위기는 반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