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세화·패키징 독점 기술 보유
독일이 글로벌 인공지능(AI) 반도체 공급망의 핵심 거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수십 년간 축적해 온 독보적인 광학·기계 엔지니어링 역량이 AI 반도체 제조의 필수 축으로 재조명받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기업도 독일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기업이 없으면 반도체를 생산할 수 없다.대표 주자는 리소그래피(노광) 장비 기업인 자이스와 트럼프다. 자이스는 반도체사업부(SMT)를 중심축으로 EUV 노광장비에 들어가는 렌즈를 독점 공급한다. 2024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본사를 찾았을 정도로 글로벌 반도체업계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자이스는 매년 매출의 15%를 반도체 연구개발(R&D)에 투입할 정도로 기술 개발에 공들이고 있다.
프랭크 로문트 자이스 SMT 최고경영자(CEO)는 “반도체 미세화 로드맵을 40년 이상 이끌어 왔다”며 “메모리와 프로세서의 연결이 중요해진 AI 시대에 맞춰 첨단 패키징 공정에서 발생하는 웨이퍼 변형을 바로잡는 등 3차원(3D) 적층 솔루션까지 지원 범위를 넓히고 있다”고 설명했다.
트럼프는 ASML의 차세대 노광장비인 하이 NA EUV의 경제성을 확보하기 위해 기존(250W) 대비 3배 이상 향상된 800W급 초고출력 광원을 개발 중이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한국 반도체 기업의 고대역폭메모리(HBM) 제조 라인에도 트럼프 제품이 쓰인다. HBM처럼 칩을 얇게 깎아 3차원으로 쌓아 올리는 공정에서는 기존의 기계식 톱을 이용한 절단이 불가능한데, 트럼프의 비접촉 초정밀 레이저 기술이 손상 없이 칩을 분리해내기 때문이다. 볼커 야콥센 트럼프 CEO는 “우리의 레이저 기술은 초미세 식각과 증착은 물론 D램, 낸드플래시, HBM 등 메모리 핵심 제조 단계의 약 80%에 적용된다”며 “한국 시장에서 30년 이상 사업을 이어온 만큼 한국 기업들과 협력을 한층 강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AI 소재 개발에도 속도
소재 분야에선 머크가 AI 반도체 생태계를 밑받침하고 있다. 머크는 화학적기계연마(CMP) 슬러리, 특수 가스 등 전공정에 필요한 소재뿐만 아니라 첨단 패키징에 쓰이는 몰리브덴 등의 소재도 생산하고 있다.머크는 데이터 레이크 시스템을 R&D 전반에 도입해 차세대 신소재 개발 기간을 대폭 단축했다. 칩을 3D로 쌓을 때 발생하는 10㎚ 이하의 미세한 빈틈을 메우는 초정밀 화학 소재나 미래 칩 내부 데이터 전송을 혁신할 실리콘 포토닉스 소재 개발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베냐민 하인 머크그룹 일렉트로닉스 부문 CEO는 “AI 메모리 수요가 급증하면서 첨단 패키징 소재의 성장 속도는 기존 전공정 소재시장을 크게 앞지를 것”이라고 강조했다. 업계 관계자는 “독일은 AI 반도체 시대에 독보적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다”며 “AI 반도체 패권 경쟁이 격화할수록 한국과 독일 간 기술 연대와 협력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 요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름슈타트·디칭겐·오버코헨=김채연 기자 why29@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