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린 시절부터 탄탄대로를 걸었던 그는 유연하고 우아한 선으로 각광받는 무용수다. 선화예고 재학 중이던 2018년 로잔 발레 콩쿠르 2위를 거머쥐며 영국 왕립발레학교로 건너간 뒤 2020년 졸업과 동시에 로열발레단에 곧바로 입단했다. 2022년 아티스트를 거쳐 퍼스트 아티스트로 활약 중인 그를 20일 서울에서 만났다. 박한나는 "한국의 정형화된 시스템보다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져야 하는 영국의 자유로운 분위기가 저에게 잘 맞는다"며 운을 뗐다.
"영국 발레의 가장 큰 매력은 무용수 각자의 개성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이에요. 무대 위에서 무용수 개인의 성격과 색깔이 그대로 드러나죠. 로열발레단은 세계적인 거장들의 라이브 안무 작업에 참여할 기회가 많고, 시즌 중 클래식과 격렬한 현대무용(컨템퍼러리 댄스)을 조화롭게 오가며 한계에 도전할 수 있는 곳입니다."

영국에서 함께 온 파트너 루크 포스켓과 합을 맞추는 이번 '2026 발레스타즈' 무대에서 그는 전통 클래식의 정수인 '라 바야데르' 3막 파드되와 거장 안무가 웨인 맥그리거(Wayne McGregor)의 대표작 '인프라(Infra)'를 각각 선보인다.
특히 '라 바야데르'는 서구의 시선으로 동양을 바라보는 오리엔탈리즘과 인종·문화적 편견 논란 등 정치·사회적 이슈로 영국 로열발레단 무대에서는 한동안 상연이 유보된 작품이다. 그래서 이번 무대는 현지 극장에서 접하기 힘든 로열발레단 단원의 '라 바야데르'를 한국에서 만나볼 수 있는 이색적인 기회이기도 하다. 이번에 선보이는 3막 파드되는 배신으로 목숨을 잃은 무희 니키아가 죽어서도 연인 솔로르를 영적으로 용서하며 애절한 여운을 남기는 클래식 발레의 정수로 꼽힌다.
이번 시즌 중 맥그리거와 직접 작업을 진행했던 박한나는 안무가로부터 '인프라'의 상연 허락도 흔쾌히 받아냈다. "('인프라'는) 뚜렷한 서사는 없지만 사람과 사람 간 관계를 다룬 작품이에요. 클래식과 컨템포러리를 넘나드는 파트너와의 호흡, 무대 위 유기적인 교감을 주의 깊게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밤낮으로 공연하는 로열발레단의 스케줄 속에서 체력적, 정신적인 한계에 부딪힐 때도 물론 있다. "바쁘게 무대에 서다 보니 슬럼프보다는 번아웃이 찾아올 때가 있죠. 그래도 제가 선택한 길인 만큼 담담히 버팁니다." 생각이 많아질 때면 런던의 사우스뱅크 강변을 따라 무작정 걷는다. 그러다가 무대에서 관객의 박수를 받고, 출퇴근길에 알아봐 주는 팬들을 만나면 다시 춤출 에너지를 얻는다.
이처럼 해외 발레단에서의 삶은 화려해 보이는 겉모습 뒤에 철저한 자립과 책임감이 요구되는 무대다. 박한나가 세계적인 무대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무작정 해외로 나가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다"라고 현실적인 조언을 건네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은 예중·예고처럼 체계적인 커리큘럼이 잘 짜여 있지만, 해외에서는 경제적인 부분부터 일상까지 모든 것을 본인이 직접 판단하고 책임져야 해요. 남들이 가니까 따라가는 게 아니라, 낯선 환경에서도 홀로 설 수 있는 적절한 타이밍과 준비가 되었을 때 떠나는 것이 맞습니다."
다섯 살 때 발레를 시작해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콩쿠르 결과로 자신의 가능성을 증명해 냈던 어린 소녀. 이제 그는 런던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 중심을 잡고 자신만의 우아한 선을 그리는 무용수로 자리잡았다. 다음 시즌. 리암 스칼렛 버전의 '백조의 호수'에서 좋은 배역을 맡고 싶다는 그는 언젠가 드라마 발레의 대작 '오네긴'의 타티아나 역을 맡는 것이 목표다. 박한나는 "부드럽고 우아하게 춤을 추는 장점을 살려, 계속 성장하는 무용수가 되겠다"고 말했다.
이해원 기자 um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