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세기 초 사도 바울이 로마와 유럽으로 복음을 전파하던 초기 교회에서는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진 음식을 먹어도 되는지를 두고 첨예한 논쟁이 있었다. 어떤 사람은 우상에게 바쳐져 더럽혀진 음식이므로 절대 먹어서는 안 된다고 했고, 음식 자체에는 아무 문제가 없으며 모든 음식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므로 먹어도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누구의 편도 들지 않으면서 '아디아포라(Adiaphora)'라는 개념으로 이 논쟁을 정리했다. 아디아포라는 그리스어로 '본질적인 문제가 아닌 것'이라는 뜻이다. 음식 자체는 신앙의 본질과 무관하며, 먹는다고 신앙에 지장이 있거나 먹지 않는다고 더 거룩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신앙에 거리낌이 없다면 자유롭게 먹고, 양심에 걸리는 사람은 안 먹으면 된다, 중요한 것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니 서로를 비난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후 신학에서는 하나님이 명령하지도 금지하지도 않은 것은 신앙의 본질이 아니므로 개인의 자유와 양심에 맡긴다는 개념으로 발전했다.
이와 유사한 논쟁은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숙종 초기 상복을 1년 입을지 3년 입을지를 두고 치열하게 다툰 예송논쟁이 대표적이다. 그 이면에는 왕권과 신권, 성리학적 정치질서를 둘러싼 철학적 대립이 있었지만,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이 문제가 나라를 뒤흔들 만큼 본질적인 문제였는지 선뜻 공감하기 어렵다. 더욱 큰 문제는 상대를 생각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틀린 사람', 더 나아가 '반드시 꺾어야 할 사람'으로 여겼다는 점이다.
바늘 끝에 천사가 몇 명 올라갈 수 있는지에 관한 중세시대 논쟁 역시 그렇다. 나름의 철학적 배경은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본질보다 비본질에 매달린 논쟁의 상징으로 회자된다.

오늘날 우리 사회 곳곳에도 이러한 '아디아포라'를 떠올릴 때가 많다. 정치·경제·교육은 물론 일상의 크고 작은 문제까지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는 것은 건강한 사회의 증거다. 그러나 의견의 차이를 다름이 아니라 옳고 그름, 심지어 선악의 문제로 여기는 순간 갈등은 시작된다. 자신과 생각이나 방식이 다르면 틀리거나 이상한 것이고 비난받아야 한다고 여기는 태도다.
그러나 모든 문제가 옳고 그름으로만 나뉠 수는 없다. 정답이 하나인 문제도 있지만, 여러 답이 공존할 수 있는 문제도 적지 않다. 어떤 사람은 효율을, 어떤 사람은 절차를 중시하고, 어떤 조직은 혁신을, 다른 조직은 안정을 선택한다. 어느 쪽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법 역시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을 정하면서도, 상당한 영역에서는 사적자치 원칙에 따라 당사자의 판단을 존중한다. 계약의 내용과 방식, 권리의 행사 여부까지 하나의 정답을 강요하기보다 서로 다른 방식과 선택을 인정하는 것이 법치주의의 중요한 원리이다.
재판을 하다 보면 본질적인 쟁점보다 사소한 감정에서 갈등이 비롯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상대방의 입장과 사고방식을 이해하지 못한 채 자신의 기준을 그대로 적용하려는 순간 정작 해결해야 할 본질은 뒤로 밀려난다.
물론 결코 양보해서는 안 되는 가치도 있다. 그러나 그 가치와 본질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비본질적인 문제에서는 서로를 이해하는 여유가 필요하다.

송무변호사의 본질은 고객의 어려움과 요청사항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이를 재판부가 이해할 수 있는 법률용어로 풀어 설득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 오랜 기간 시행착오를 거치며 축적된 표준적인 업무방식은 존재하지만, 변호사에 따라 고객과 소통하는 방식, 자료를 정리하거나 서면을 작성하는 스타일, 법정에서 변론하는 방식은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 그런데 이는 본질의 문제가 아니다.
필자는 로펌 초기에 어쏘변호사가 작성한 서면 초안을 대부분 내 스타일로 고치느라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는 했다. 하지만 그러다 정작 핵심 논리와 쟁점에 집중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제는 양질의 변론을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할 부분과 각자의 재량에 맡겨도 되는 부분을 구분하고 있다.
본질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문제까지 하나의 기준으로 통일하려 하거나 옳고 그름의 잣대로 재단한다면 공동체는 숨 쉴 공간을 잃는다. 사소한 차이를 인정하는 사회가 오히려 중요한 가치를 더욱 굳건히 지킬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우상 제물 문제를 해결하면서 먹어도 된다거나 안 된다는 결론보다 더 중요한 원칙을 남겼다. 서로의 양심을 존중하라는 것이었다. 자신에게 허용된 자유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가 된다면 한 걸음 물러설 줄 알고, 자신의 기준을 타인에게 강요하지도 말라는 것이다. 자유와 관용은 서로를 제약하는 개념이 아니라 서로를 완성하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일 수많은 의견의 차이 속에서 살아간다. 그때마다 스스로에게 한 번쯤 질문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문제는 정말 본질적인가, 아니면 아디아포라인가.' 이 질문 하나만으로도 불필요한 갈등의 상당수는 사라질 수 있다. 성숙한 공동체는 모든 사람이 같은 생각을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끝까지 지켜야 하는 본질로 삼고, 무엇을 서로 인정할 수 있는 다름으로 남겨둘 것인지를 함께 분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만들어진다.
17세기 독일 신학자 루페르투스 멜데니우스는 이를 이렇게 정리했다. "본질에서는 일치를, 비본질에서는 자유를, 모든 것에는 사랑을(In necessariis unitas, in non necessariis libertas, in omnibus caritas)".
2천년 전 사도 바울이 전한 아디아포라의 지혜 역시 결국 같은 곳을 향한다. 본질에서는 흔들림 없는 원칙을, 비본질에서는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는 관용을, 그리고 그 모든 것 위에는 사랑을 두는 것. 그것이야말로 오늘 우리 사회가 다시 새겨야 할 아디아포라의 정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