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상 운임이 널뛰는 가운데 국내 해운사들이 선대 재편에 속도를 내고 있다. 벌크선 강자 팬오션은 수익성이 높은 유조선과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을, 국내 최대 컨테이너선사 HMM은 장기계약 비중이 높은 벌크선을 키우는 식이다. 선대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해 특정 선종의 부진이 전체 실적에 미치는 영향을 줄인다는 전략이다. 중동 전쟁 장기화로 시황 예측이 한층 어려워지면서 해운사들의 이 같은 움직임은 더욱 본격화할 전망이다.
◇벌크 키운 HMM, 탱커 늘린 팬오션
해운업계에 따르면 HMM의 벌크 선대는 지난해 3월 말 44척에서 올해 5월 말 61척으로 38.6% 늘었다. 최근에는 1조6641억원을 투자해 벌크선 8척과 가스선 2척 등 10척을 새로 발주하기로 했다. HMM은 2030년까지 벌크 선대를 110척으로 늘릴 계획이다. 시황에 따라 이익이 출렁이는 컨테이너선과 달리 벌크선은 안정적인 현금흐름 창출에 유리하다.벌크 사업 확대 효과는 실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HMM의 전체 영업이익에서 벌크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2024년 3.8%에서 올해 1분기 30.8%로 뛰었다. 유류비 상승 등 악재에도 HMM은 1분기 9.9%의 영업이익률을 기록했다. 글로벌 주요 선사 중 세 번째로 높은 수준이다. 컨테이너 부문의 부진을 벌크 사업이 일부 보완한 덕이다.
팬오션은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1분기 운항일수 기준 벌크선 비중이 82%에 달하는 이 회사는 올 들어 초대형 원유운반선(VLCC) 7척을 1조3445억원에 신규 발주했다. 지난 2월 SK해운의 중고 VLCC 10척을 인수하는 계약까지 더하면 보유 VLCC는 19척으로 늘어난다.
팬오션이 탱커 부문을 키우는 건 높은 수익성 때문이다. 1분기 탱커 부문 매출은 775억원으로 벌크 부문의 10분의 1 수준이지만 영업이익은 281억원으로 벌크 부문의 절반에 달했다. LNG 부문도 전년 동기보다 49.7% 증가한 472억원의 영업이익을 내며 실적을 뒷받침했다.
해운사들이 선대 구성을 다변화하는 배경에는 해운업 특유의 변동성이 있다. 시황에 따라 운임이 급등락을 반복하는 데다 선종별로 운임을 좌우하는 요인도 제각각이다. 컨테이너선은 미국·유럽의 소비와 선복 공급, 벌크선은 중국의 철광석 수요와 곡물 물동량, 탱커는 원유 수송 수요와 중동 정세에 영향을 받는다. 최근에는 중동 분쟁과 관세 갈등 등 외부 충격까지 잇따르면서 주력 선종 하나에만 의존해서는 안정적인 실적을 내기 어려워졌다.
◇장기계약으로 물량 확보
선사들은 장기계약 비중도 높이고 있다. 단기적인 운임 변동에 따른 실적 충격을 줄이고 안정적인 물량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HMM은 브라질 광산업체 발레와 1조660억원 규모의 10년 장기 운송계약을 맺은 데 이어 25년짜리 전용선 계약도 추진하고 있다. 팬오션은 장기계약 비중이 매출 기준 40%, 영업이익 기준 70%에 달한다. 최근에는 SK에너지·SK인천석유화학과 2조4712억원 규모의 20년 원유 운송계약을 체결했다. LNG선도 글로벌 에너지 기업과의 장기 용선계약을 중심으로 운용하고 있다.항로도 다변화하고 있다. HMM은 스페인 알헤시라스를 거점으로 서아프리카 주요 항만을 연결하는 신규 서비스를 시작했다. 대형 선박이 거점항까지 화물을 나른 뒤 중소형 선박이 주변 항만으로 운송하는 ‘허브앤스포크’ 방식이다. 혼잡한 항만 기항을 중소형 선박에 맡겨 대형선의 운항 효율을 높일 수 있다.
사업 재편이 이어지는 가운데 2분기 실적도 개선될 전망이다. 인공지능(AI) 기반 투자정보 서비스 에픽AI에 따르면 HMM의 올해 2분기 영업이익 컨센서스는 전년 동기(2332억원)보다 30.7% 늘어난 3047억원이다. 팬오션은 전년 동기(1230억원) 대비 23.0% 증가한 1513억원이다. 해운업계 관계자는 “시황 예측이 어려운 국면에서는 선대 구성과 장기계약 비중이 곧 리스크 관리 능력”이라며 “중동 분쟁이 장기화할수록 포트폴리오 다변화의 중요성도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송준영 기자 ss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