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더라도 미세하게 버텼어야 했다. 전투를 해버렸다.”
세계랭킹 1위 신진서 9단의 고백이다. 그는 바둑AI 모델 카타고(KataGo)와 첫 번째 대국에서 254수 만에 불계패했다. 대국을 복기하면서 그가 한 첫 마디는 AI와 인간 대결의 본질을 보여준다. 17일 오전 10시 서울 중구 한국경제TV스튜디오에서 열린 쎈수학·한경 기신전(棋神戰) 3번기의 첫번째 대국. 2016년 이세돌과 ‘알파고’ 대결 이후 10년 만에 열린 대결은 첫 번째 대국에서 인간의 완패로 끝났다.
◆승률 99%, 18집을 안고 시작한 승부

알파고 쇼크 후 프로기사는 AI의 '블루스팟(최적의 착점)'을 외우며 바둑을 공부했다. 인간이 AI의 뒤를 쫓는 것에 만족할 수는 없는 일. 세계 최강 신진서는 무모해 보이는 도전에 승부를 걸었다.
이날 대국은 신진서가 2점을 먼저 놓는 접바둑으로 진행됐다. 카타고의 엄청난 연산 능력, 인간과 AI 사이에 엄연히 실재하는 이 격차를 인정하는 ‘룰 셋팅’이었다. “2점 접바둑이라면 인간이 거듭 발전했을 때 이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신진서의 대국 전 인터뷰 내용이다. 그는 “연습을 해보니 불가능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카타고의 2점 핸디캡은 인간에게 강력한 방패였다. 대국은 흑을 잡은 신진서가 첫 수를 놓기도 전에 99% 승률로 시작했다. 인류 최강인 신진서 9단이 18집을 안고 시작한 형세였다.
그는 "18집이라는 차이는 큰 차이라고 하면 크지만, 작은 차이라고 하면 작을 수 있다. 보통 38수 정도 두면 역전되는 차이다. 집 차이가 어느 시점에서 떨어지는지 봐주시면 좋을 것 같다"고 설명했다.
신진서의 전략은 명확했다. 18집의 두터운 우세를 바탕으로 최대한 변수를 줄이며 단단하게 판을 짜는 것, '지키는 바둑'이었다. 초반의 압도적인 우세를 후반 끝내기까지 지킨다면, 아무리 신산(神算)의 능력을 갖춘 AI라고 해도 18집의 벽을 허물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카타고, 백 3수의 파격…심리적 교란

카타고는 이를 예상한 듯 초반부터 변칙 수를 들고나왔다. 평소 연습 대국과 달리 첫수를 화점에 놓은 카타고는, 두 번째 수(백 3수)로 우상귀에 세 칸 높은 걸침 수를 뒀다. 홍민표 바둑 국가대표 감독은 “평생 보지 못한 수”라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평생 보지 못한 수다. 우상귀에 걸친 것인지, 우변을 갈라친 것인지도 모호한 중간 자리다. 사람 바둑을 포함해 단연코 처음 본다.”
탄식이 나올 정도의 파격이었다. 결론적으로 복기 과정에서 내린 결론은 정교하게 계산한 심리적 교란이었다.
신진서는 당황하지 않고 우상귀를 날일자로 굳히며 실리를 챙겼다. 처음 구상한 대로 전투를 피하고 집바둑으로 가겠다는 침착한 대응이었다. 대국 중반 초입인 56수까지 신진서의 AI 일치율은 69.7%에 달했다. 승률 역시 99.5%를 견고하게 유지했다. 검토실의 조한승 프로기사협회 회장 역시 “처음에는 흑이 포석을 짜기 어려울 줄 알았는데, 실수 없이 견고하게 잘 지키고 있다”고 안도했다.
그러나 돌이 엉키고 판이 복잡해지면서 균열이 시작됐다. 카타고는 43수 등에서 매우 가볍고 경계를 잘 아는 ‘깃털 같은 수’를 던지며 집 차이를 좁혔다. 권투로 치면 상대를 교란시키며 방향을 빠르게 전환하는 유연한 ‘잽’과 같은 수가 연이어 나왔다. 신진서는 카타고의 페이스에 말려 소극적으로 대처하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집 차이가 줄어들고 적극적으로 다가서면 판이 꼬이는 딜레마에 빠졌다. 18집이라는 우세가 오히려 “지켜야 한다”는 심리적 족쇄가 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우세가 줄어들자 선택한 무리수
고비는 중앙에서 찾아왔다. 중앙은 귀나 변과 달리 사방이 열려 있어 사람이 가장 어렵게 느끼는 미지의 영역이다. 흑 70수를 기점으로 철옹성 같던 99%의 승률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78수와 79수를 거치며 집 차이는 어느새 7.5집으로 좁혀졌다.
세계 일인자의 마음속에도 조급함이 생겨났다. 신진서는 무리하게 공격을 감행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그러나 차이가 너무 빠르게 줄어들자 심리적 방어선이 무너졌다. 89수에서 승률은 94%, 집 차이는 5집까지 좁혀지며 카타고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왔다.
오전 10시에 시작한 대국이 2시간여가 지나면서 관전실에서 짧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신진서가 선택한 90수가 치명적인 실착이 된 것이다. 카타고가 치고 들어올 91수의 자리를 보지 못한 채 둔 판단 착오다. 절친한 입단 동기인 신민준 9단은 안타까워했다.
“진서가 계속 손해를 보다 보니 사람과 대국할 때와 달리 조급해진 것 같습니다. 공격적으로 먼저 가지 않는 스타일인데, 차이가 줄어드니 좀 더 강한 수를 둔 것 같습니다.”
판세가 위태로워지자 신진서는 전략을 완전히 바꿨다. 102수로 중앙의 백 대마를 통째로 포위하는 강수를 던진 것이다. 지키는 바둑에서 전면적인 전투 바둑으로 급선회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완벽한 수 읽기 능력을 갖춘 카타고를 공략하기에는 무리수였다. 카타고는 가볍고 유연하게 타개에 성공하며 백 대마를 살려 나갔다. 104수 만에 승률 그래프는 마침내 역전됐다.
“사람과 두면 판세가 불리해져도 심리적으로 무너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AI와의 대국은 불리해지는 순간 지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실수하면 끝’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버티기가 너무 힘든 것입니다.” 조한승 회장의 분석이다.
◆AI가 만든 판에서 '자기 바둑'을 지키는 일
형세가 역전된 이후에도 신진서는 상변에서 패싸움을 벌이며 100여 수를 더 버텼다. 비록 집 차이가 30집 이상 벌어지며 245수 만에 돌을 던져야 했지만, 끝까지 최선의 수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대국이 끝난 후 신진서의 표정에는 짙은 아쉬움이 묻어났다.
“처음부터 당혹스러운 수를 당했습니다. 시종일관 판을 내 스타일대로 짜지 못했습니다. 지더라도 미세하게 버텼어야 했는데 무리하게 전투를 한 것이 패인입니다.” 그는 “다음 대국에서는 전략을 최대한 잘 구상해서 나와야 할 것 같다”는 말로 첫 대국을 마무리했다.
카타고는 승부수를 던지지 않았다. 작은 이득을 조금씩 쌓으며 격차를 지웠다. 해설을 맡은 기사들은 “가장 작게 내어주는 수를 선택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화려한 한 수가 아니라, 촘촘하게 쌓인 작은 정확함이 18집의 격차를 지운 것이다.
신진서와 카타고의 승부는 인간이 AI를 이길 수 있느냐가 아니라, AI가 만든 낯선 판에서도 인간이 자신의 전략과 스타일을 지킬 수 있느냐를 시험한 대국이었다. 1국에서 신진서는 18집의 우세보다 먼저 자신의 바둑을 잃었다. 다음 승부의 관건은 카타고를 얼마나 깊이 읽느냐가 아니다. 끝까지 신진서답게 둘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AI의 위력을 꿰뚫어본 본 1020세대
한경TV는 와우넷 회원들을 대상으로 사전 설문조사를 했다. 전체 응답자의 61%가 카타고의 승리를 예상했다. 눈에 띄는 점은 AI를 바라보는 세대별 시각차였다.
10대와 20대는 8대 2라는 압도적인 비율로 카타고의 완승을 점쳤다. 1020 세대는 자신들의 일상 속에서 AI를 가장 가깝고 밀접하게 접해온 ‘AI 네이티브’ 세대다. 기계가 가진 무결점의 연산 능력,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이성적 판단의 무서움을 피부로 알고 있는 세대다. ‘두 점’이라는 핸디캡조차 기계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될 것이라고 냉정하게 예측한 것이다. 반면 3040 세대는 52 대 48로 인간과 기계가 팽팽하게 맞설 것으로 봤다. 신진서라는 천재의 위대함과 18집의 우세를 바라본 결과다.
흥미롭게도 50대 이상 장년층 세대로 넘어가자 다시 36 대 64로 카타고의 승리 비중이 높아졌다. 이는 과거 알파고가 이세돌을 무너뜨렸을 때의 충격을 강렬하게 기억하는 세대의 심리적 경외감이 반영된 수치로 풀이할 수 있다.
이심기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