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정고시 출신으로 34년간 공직에 몸담으며 문화체육관광부 관련 9개 법안 제정을 주도한 용호성(59) 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 지난해 8월 퇴임한 그는 AI 작곡가 '닥터 드래곤(Dr. Dragon)'으로 새 삶을 살고 있다. 최근 스위스 몽트뢰에서 열린 국제 AI 작곡 경연대회 'AI 러브 재즈(AI Love Jazz)'에서 우승하며 화제가 됐다. 용 전 차관을 서울 중림동 한국경제신문 본사에서 만났다. 작곡가, 교수, 작가, 드러머. 은퇴 후 일상은 공직 시절 못지않게 빼곡하지만, 얼굴엔 여유가 넘쳤다.
"평론에서 창작으로" AI가 가교 역할
용 전 차관의 관심은 문화예술 전반에 걸쳐 있다. 1993년 문화체육부(현 문화체육관광부)에 입직한 그는, 공직 생활 내내 음악평론과 드럼 연주를 병행해온 '음악 마니아'다. 연 100회 가까이 공연장과 미술관을 찾고 3000여권의 책을 소장한 다독가이기도 하다. 그런 그도 작곡은 엄두가 안났던 영역. 은퇴 후 AI 작곡 기술에 눈을 뜨며 창작자로 도전이 시작됐다.
용 전 차관은 "음악 평론을 하고 음반을 모으고 밴드를 하는 것과 내 음악을 만드는 것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다고 생각했다"며 "생성형 AI가 그 강 위에 뜻밖의 다리를 놓아줬다"고 말했다. 은퇴 후 그는 SM유니버스에서 AI 작곡 과정을 3개월간 수강했다. 평생 음악의 향유자에서 창작자로 전환되는 결정적 순간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70여 곡을 만들었고, 이번 대회에는 펑키한 리듬의 보컬 재즈 곡 '프로즌 에지(Frozen Edge)'를 출품해 우승했다. 가장 감격적이었던 순간은 경연에서 실제 재즈 밴드가 자신의 곡을 라이브로 연주할 때였다. 그는 "재즈는 즉흥적인 인간의 감성이 무엇보다 중시되는 장르인데, 인간의 생각을 AI가 소리로 구현하고 AI가 만든 음악을 다시 인간이 연주하는걸 들었을 때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고 했다.

작업 도구는 음악 생성 AI '수노(Suno)'와 디지털 오디오 워크스테이션(DAW). 가사를 먼저 쓴 뒤, 곡의 콘셉트를 프롬프트로 입력한다. "60년대 말 벨벳 언더그라운드 1집의 여성 보컬 스타일에 첼로와 바리톤 색소폰의 선율을 얹어달라"는 식이다. 악기 구성과 분위기, 인트로부터 아웃트로까지의 전개를 세세히 적다 보면 프롬프트가 한 페이지를 훌쩍 넘는다.
이후엔 머릿속 아이디어를 더해가며 결과물의 순도를 끌어올린다. 프롬프트를 바꿔가며 수십개의 버전을 뽑아본 뒤, 마음에 드는 멜로디를 DAW로 옮겨 편집하거나 샘플링과 직접 녹음한 보컬을 덧붙여 재구성하는 과정을 거친다. 때론 파가니니의 '카프리스'에 랩 메탈을 입히고 보들레르의 시를 얹는 등 장르를 넘나드는 실험도 서슴지 않는다. 평생 쌓아온 그의 문화예술 지식이 AI를 만나 창작의 재료로 활용되고 있다.
셰익스피어 소네트 154편, AI로 다시 쓴다
그는 현재 셰익스피어 소네트 154편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곡을 붙이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세계적인 대문호인 셰익스피어의 작품에는 인간사의 다양한 모습과 성찰이 담겨 있다"는 게 그가 소네트를 택한 이유다.
클래식, 팝, 랩, 메탈, 재즈 등 14개 장르로 각 11곡씩, 총 154곡을 완성할 계획이다. 그중 일부는 8월 말부터 순차 공개할 예정이다.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다듬다 보니 작곡 기간은 곡마다 들쭉날쭉하다. 짧게는 하루 이틀, 길게는 한달 넘게 걸린다. 곡 작업에 필요한 비용은 AI 구독비용 약 40만~50만원 정도만 든다.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

닥터 드래곤의 왕성한 창작력은 어디서 나올까. 자신의 취향으로 촘촘하게 채운 하루 루틴이 핵심이다. 매일 아침 5시 반 기상해, 4.5km 러닝, 드럼 연습, 집필과 작곡, 저녁에는 주 2~3회 중앙대 예술대학원과 서강대 기술경영전문대학원에서 AI 시대 콘텐츠 전략을 강의한다.
그는 심리학자 에드 디너의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는 말을 삶의 신조로 삼는다. "은퇴 후에도 행복지수가 떨어진 적이 없다"는 그는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활동의 빈도를 촘촘하게 채우는 것이 행복을 결정하며, 그래야 예측 불가능한 시련도 단단하게 버텨낼 수 있다"고 말했다.
AI 시대, '재현'에서 '창작'으로
용 전 차관은 AI와 접목된 예술의 미래에 낙관적인 입장을 내놨다. 그는 "과거 미디(MIDI), 샘플링, 오토튠이 처음 등장했을 때도 비판받았지만 지금은 많은 사람이 쓰는 도구가 됐다"며 "AI 역시 음악가의 유능한 보조 작업자로 자리 잡을 수 있다"고 봤다. 해외에서는 이미 AI 창작물을 유통하며 저작권까지 관리해주는 업체들이 생겨나는 추세다.
중요한건 AI시대 예술에서 인간의 영역이 '재현'보단 '창작'에 집중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뒤샹 이후 미술이 자연의 모사에서 개념과 메시지를 담는 방식으로 바뀌었듯, 음악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AI기술은 인간 창작자를 대체하는 게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을 창작의 주체로 만드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과거 남이 만든 음악을 골라 듣던 '소비자'에서, 이제는 직접 곡을 만들어 듣는 '생산자'가 된 그가 시대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 사례다. 그는 "AI 시대엔 아주 똑똑한 어시스턴트가 생긴 셈이니, 중요한 건 경험과 관점을 가진 '디렉터'이자 '프로듀서'의 역할"이라고도 했다. 이어 "초중고 음악 교육도 가창, 연주 기법 중심의 '재현'에서 '어떤 음악을 왜 만드는가'를 고민하는 '창작' 중심으로 바뀌어야 한다"며 "학생들도 AI로 직접 곡을 만들며 창작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조민선 기자 sw75j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