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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도 달렸다…'소설가'의 마라톤 이야기 [나연만의 달려도 달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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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도 달렸다…'소설가'의 마라톤 이야기 [나연만의 달려도 달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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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장매체가 늘어날수록 기록하는 일에는 오히려 게을러진다. 한때 청춘을 바쳐 열심히 쓰던 싸이월드나 블로그 서비스 이글루스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그 허망한 배신을 몇 번 겪고 나니 더 이상 기록에 공을 들이지 않는다. 게으름을 플랫폼의 배신이라는 핑계로 덮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그렇다.

    그러다 보니 과거의 특정 연도에 내가 뭘 하고 살았는지 더듬어보기가 무척 어려워졌다. 최근 새 소설 자료가 필요해 강호순에 대해 알아보다가 그가 2009년에 검거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지인과 그 이야기를 나누다가 “넌 그때 뭘 했느냐”는 질문을 받고 머릿속이 하얗게 된 적이 있었다. 일기장조차 없으니, 결국 포털 창에 그해의 굵직한 사건 사고를 검색해 보며 기억의 좌표를 유추하는 수밖에 없다.


    2009년. 당시 대통령은 이명박이었다. 연쇄살인마 강호순이 체포되었고, 두 전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났다. 새벽녘, 흥분한 목소리로 전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알려왔던, 재즈를 사랑했던 내 친구가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건네주었던 해가 바로 2009년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어떤 서랍이 열리듯 잊고 지냈던 그 시절의 기억들이 꼬리를 물고 생생히 되살아난다.

    회사에서 헉헉대며 일하느라 먹고살기 바빴던 당시의 나로서는 이 소설가의 에세이가 전혀 와닿지 않았다. “일요일. 아침나절에 칼라 토머스와 오티스레딩의 음악을 MD로 들으면서 1시간 15분간 달렸다. (중략) 그 뒤에 하나레이 거리의 입구 근처에 있는 돌핀 레스토랑에서 맥주를 마시고, 생선 요리를 먹었다.” 같은 도입부를 읽으며 “팔자 편하구먼”같은 소리를 내뱉었던 게 기억난다. 당시 나는 소설을 써 본 적이 없었으며, 마라톤대회에 참가하기는커녕 아는 마라토너조차 없었다. 그러니 이 에세이가 지독하게 낭만적이고 부르주아적으로 와닿았던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다 몇 년이 흘러 나는 신춘문예 최종심에 이름은 두어 번 실린 소설가 지망생 정도는 되어있었다. 그러니 문학상 수상작에 관심이 많은 것은 당연할 터. 당시 한겨레문학상 당선작인 장강명 작가의 『표백』도 개중 하나였다. 표백은 내용만큼이나 “마라톤 풀코스를 5번 완주”했다는 작가 이력이 강렬하게 기억에 남았다.
    영감이 아닌 용기, 소설을 밀고 나가는 힘
    무라카미 하루키와 장강명은 데뷔를 간절히 원하던 내게 소설가적 영감을 주기보다는 소설가가 되기 위한 '용기'를 주었던 작가들이다.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천재적인 영감이 아니라, 매일 정해진 거리를 달리는 묵묵한 육체의 노동으로 소설이라는 거대한 세계를 밀고 나갈 수 있다는 사실(실제로 나는 육체노동을 선호한다)이, 막막한 원고지 앞을 서성이던 지망생에게는 묘한 안도감이자 동력이 되었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흘러 어쩌다 보니 소설가가 되어 있었다. 그제야 떠오른 사실이 있다. 분명한 건 내가 달리기를 하지 않던 시절이었음에도 내면에는 ‘등단(개인적으로는 좋아하지 않는 표현이지만 직관적이기에 쓴다)하면 달리기도 해봐야겠다’라는 묘한 욕심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홀린 듯-하지만 무의식의 이끌림에 의해 마라톤 풀코스 신청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 이제는 나도 소설가로서 꺼드럭대며 달리기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긴 것이다! 이제야 말할 수 있다. 소설가의 달리기.
    꺼드럭대며 깨달은 진실, 160근의 마라톤
    하지만 그 잘난 자격을 얻고 그들의 세계에 당당히 발을 들인 뒤에야, 장강명 작가처럼 풀코스를 다섯 번 완주한 후에야, 나는 아주 뼈저린 진실 하나를 마주하게 되었다. 나는 달리기를 하면 아무 생각을 할 수 없다. 힘들어서. 그렇지만 달린다.

    온종일 책상머리에 앉아 캐릭터들의 생각을 파악하고, ‘영장청구 전 검사가 피의자를 대면할 때 배석해야 할 최소 인원이 몇인가’ 같은 질문에 답을 구하며 시간을 보내다 보면 머리털이 한 움큼 빠져있거나 진이 빠져 뻗어있거나 개와 고양이 밥을 바꿔주는 등의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난다. 그럴 때, 젖 먹던 힘을 다해 뻗어있는 몸을 일으켜야 한다. 선크림을 바르고 팬츠를 입고 운동화를 신은 다음 무작정 밖으로 나서야 한다.



    하루키처럼 하와이의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오티스 레딩을 듣는 낭만 같은 건 내게 없다. 배달 오토바이가 굉음을 내며 스쳐 지나가고, 매연 냄새가 섞인 동네 천변 아스팔트 길 위에서 160근에 달하는 몸을 이끌고 오직 땀을 뻘뻘 흘리며 헉헉댈 뿐이다. 머릿속엔 오직 ‘왜 이리 더울까’, ‘내가 왜 사서 이 고생을 할까’ 하는 원초적인 고통만 가득 찬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활자의 미로에 갇혀 과부하가 걸려 있던 뇌가 비로소 멈춘다. 온종일 소설 속 인물들과 멱살을 잡고 진을 빼내던 지독한 정신적 피로가, 길 위에서 육체의 고통으로 치환되며 씻겨 내려가는 것이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몸을 극한으로 몰아붙이는 그 백지상태야말로, 소설가에게는 다시 노트북 앞에 앉을 수 있게 만드는 리셋 버튼이다.


    이제야 2009년에 덮어버렸던 그 에세이의 진짜 문장들이 보인다. 그리고 그들이 어째서 마라톤을 했는지 감히 짐작도 해본다. 하루키와 장강명이 말한 소설과 마라톤의 공통점, ‘일단 리듬이 설정되면, 그 뒤로는 어떻게든 풀려나간다’, ‘3분의 2지점을 통과하면 그 다음부터는 저절로 끝까지 가게 된다’는 진리에 공감하면서 말이다.

    계속 쓰기 위해, 그리고 끊임없이 생각해야 하는 직업을 견뎌내기 위해 그들은 맹렬하게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육체의 고통 속으로 스스로를 던져야만 했던 건 아닐까.




    현관문 앞, 마감주의보에 쫓겨 한동안 방치해 둔 알파플라이를 내려다본다. 시퍼런 스우시로고가 이제 그만 밖으로 나가자고 시위하는 듯하다. 당장 내일 새벽에는 기필코 뛰어 나가리라 다짐한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다시, 지독하게 생각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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