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명 대통령의 지난 6월 이탈리아 국빈방문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장면은 존 엘칸 페라리 회장과 한국 대표 기업인들과의 만남이었다. 엘칸 페라리 회장은 6월 11일 세르조 마타렐라 이탈리아 대통령 주최 국빈 만찬에 참석해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조현준 효성그룹 회장 등 한국 재계 인사들과 교류의 시간을 가졌다. 엘칸 회장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재벌가(家)인 아넬리 가문 후계자로 슈퍼카 브랜드인 페라리를 비롯해 글로벌 4위 완성차 업체인 스텔란티스, 엑소르 회장을 맡고 있다.
이튿날인 12일 열린 ‘한국-이탈리아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에서도 베네데토 비냐 페라리 최고경영자(CEO)가 한국 기업인들과 소통의 시간을 가졌다. 비냐 CEO는 “한국은 끊임없이 영감을 주는 시장이자 고향과 같은 국가”라며 각별한 친근함을 전했다. 글로벌 최고 슈퍼카 브랜드이자 이탈리아 시가총액 1위 기업인 페라리의 이례적인 ‘친한(親韓)’ 메시지를 놓고 이 회장과 조 회장 등 페라리와 긴밀한 관계를 이어온 재계 총수들의 스토리가 주목을 받고 있다.
○페라리의 ‘영감’…그 뒤엔 ‘한국 기업’
비냐 페라리 CEO의 ‘영감’ 발언은 의례적인 인사가 아니다. 그는 “한국은 끊임없이 영감을 주는 시장”이라고 말한데 이어 한국 기업인들에게 전동화·디지털화 분야의 공동 연구개발(R&D)도 제안했다. 한국이 럭셔리카 마케팅 분야에서 새로운 영감과 에너지를 주는 시장일 뿐 아니라 첨단기술과 디자인 분야에서도 상호 간에 ‘윈-윈’이 될 수 있는 파트너 국가로 규정한 것이다.
페라리는 올해 1월 서울 반포전시장에서 ‘12칠린드리 테일러메이드’를 공개했다. 유명 스포츠카인 12칠린드리에 한국 문화를 입힌 제품인데 전 세계에 단 한 대뿐인 맞춤 차량이다. 시트는 갓을 만드는 말총의 직조 방식으로 디자인했고 내부엔 전통 가구와 옻칠에서 차용한 요소도 배치했다. 페라리가 차를 팔기 위한 마케팅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한국과 연결하는 노력을 보인 것으로 해석된다. 지난 6월 서울 성수동에 마련된 페라리 브랜드 팝업 공간인 ‘카사 페라리’도 예약 시작 1시간 만에 2000여 명의 신청이 몰리면서 마감됐다. 신규 고객의 40%가 40세 미만일 정도로 ‘젊어지는 페라리’ 전략의 최전선도 한국으로 꼽힌다. 비냐 CEO가 “한국 고객들의 열정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말한 것도 이런 이유다.
페라리와 한국 고객이 만나는 접점들을 지난 10년에 걸쳐 설계해온 파트너가 바로 효성이다. 서울 반포와 부산 해운대의 프리미엄 전시장부터 합작법인 페라리코리아가 주관한 카사 페라리까지 페라리가 한국 시장의 열정을 직접 체감하는 무대들은 모두 효성과의 파트너십 위에서 만들어졌다. 슈퍼카 업계에서는 “비냐 CEO가 말한 영감의 상당 부분은 효성이 일궈온 한국 페라리 생태계에서 나온 것”이라고 평가한다. 디테일에서 차이를 만들고 완성도에서 경쟁력을 찾는 이탈리아의 마에스트로 정신과 ‘최고의 기술과 완벽함에 대한 집념’을 추구해온 효성의 가치가 공감대를 형성한 결과라는 해석이 나온다.
여기에 ‘K-기술을 통한 영감’을 제공하고 있는 대표 주자가 삼성이다. 페라리는 신차 ‘페라리 루체(Ferrari Luce)’의 핵심 인터페이스인 차량용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디스플레이를 삼성에 맡길 만큼 한국의 기술력을 신뢰하고 있다.
○이재용 회장, 존 엘칸 회장과 27년 인연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마타렐라 대통령이 주최한 국빈 만찬 직후 차담회에서 이 대통령에게 엘칸 페라리 회장을 소개하며 “27년 된 친구”라고 말했다. 이 회장은 과거 페라리 엑소르의 사외이사를 지내며 엘칸 회장과 각별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그가 삼성이 아닌 다른 회사의 사외이사를 맡은 건 이때가 유일하다. 이 회장은 엘칸 회장과의 인연에 대해 “저희가 디스플레이 (페라리에) 납품을 한다”며 “(엘칸 회장은) 페라리뿐 아니라 스텔란티스의 회장이기도 한데 스텔란티스와 삼성SDI가 배터리 합작 공장도 같이 짓고 있다”고 말했다.
삼성디스플레이는 2023년 페라리의 차세대 자동차 모델에 탑재하는 디스플레이 솔루션 개발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삼성SDI도 스텔란티스와 협력해 미국 인디애나주 코코모에 배터리 합작법인 ‘스타플러스에너지’를 운영 중이다.
○조현준 회장의 FMK, 韓서 매출 10배 성장
한국에서 유일하게 페라리 딜러 사업을 이끌어온 조현준 효성그룹 회장과 엘칸 회장의 인연도 주목을 받고 있다. 조 회장은 이 대통령의 이탈리아 순방에 앞서 넉 달 전에도 엘칸 회장을 만났다. 그는 올해 2월 이탈리아 마라넬로의 페라리 본사를 방문해 엘칸 회장과 회동했다. 조 회장과 엘칸 회장은 효성-페라리 양사가 딜러 사업 외에 패션 분야 등 추가 협력 확대 방안을 논의했다.
페라리는 2021년 마라넬로 공장에서 첫 패션쇼를 연 이후 패션 사업에 관심을 갖고 있다. 페라리 브랜드를 경험하는 사람들을 늘려 잠재 고객을 확보하고 충성도도 높이겠다는 전략에서다. 딜러 사업 파트너이자 글로벌 톱티어 섬유 기업인 효성과의 협업 확대를 모색한 것. 효성은 세계 1위 스판덱스 생산 회사로 고기능성 섬유 브랜드인 ‘크레오라(CREORA)’와 친환경 섬유 브랜드인 ‘리젠(regen)’을 운영하고 있다.
재계에서는 효성과 페라리의 협력이 조 회장과 엘칸 회장의 20여 년에 걸친 우정에서 나온다고 보고 있다. 엘칸 회장은 2016년과 2023년 두 차례 한국을 찾았고 그때마다 조 회장과 비공개 회동을 가졌다. 2016년 첫 방문 때는 자동차산업 전반과 협업 확대 방향에 관해 논의했다. 이어 2023년 만남 때는 비냐 페라리 CEO를 비롯한 그룹 수뇌부가 총출동했다.
효성과 페라리의 인연은 200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동아원그룹이 국내 페라리 사업권을 확보할 수 있도록 조 회장이 엘칸 회장과의 친분을 통해 측면 지원을 한 게 시작이었다. 2015년 효성이 국내 페라리 공식 딜러사인 FMK를 동아원으로부터 인수하면서 양사의 관계가 탄탄해졌다. FMK가 전시장과 고객경험 확대에 집중 투자한 결과 국내 페라리 판매량은 연평균 16.8% 성장했다. 2019년 FMK는 페라리의 전 세계 딜러 네트워크에서 글로벌 최우수 딜러로도 선정됐다. 한국 시장이 페라리의 전략적 거점으로 부상한 계기다.
2023년 6월에는 페라리가 아시아 최초로 한국에서 개최한 ‘우니베르소 페라리(Universo Ferrari)’ 전시회에 효성을 소개하는 공간이 마련되기도 했다. 우니베르소 페라리는 페라리의 역사와 미래 전략을 집약한 브랜드 최고 전시회다. 당시 개최국은 텃밭인 이탈리아와 한국, 중국뿐이었다. FMK의 매출은 효성이 인수하기 전인 2014년 220억원 수준에서 2025년 2160억원 수준으로 10여년 만에 10배 가까이 급성장했다.
효성과 페라리의 끈끈한 파트너십은 2025년 10월 합작법인 페라리코리아 출범으로까지 이어졌다. 글로벌 슈퍼카 브랜드가 국내 딜러와 지분을 나누는 조인트벤처(JV)를 설립한 것은 이례적인 일로 꼽힌다. 이번 JV 설립은 조 회장과 엘칸 회장 등 오너 간의 굳건한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수입차업계는 평가하고 있다.
김보형 기자 kph21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