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출근길에서도 한 번쯤 마주쳤을 신발이 있다. 번화가를 5분만 걸어도 신은 사람 여럿을 볼 수 있는, 이제는 유행을 넘어 클래식이 된 운동화. 바로 나이키 에어포스 1이다. 이 신발은 누군가에게는 ‘첫 나이키’이고, 누군가에게는 신발장에 하나쯤 넣어두는 가장 만만한 선택지다.
1982년 태어나 40살을 훌쩍 넘긴, 이제는 ‘중년’이 된 에어포스 1은 원래 이렇게 오래 살아남을 운명의 신발이 아니었다. 지금에야 나이키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신발 중 하나로 불리지만, 한때는 본사에서 생산을 중단한 모델이었다. 흥미로운 건 이 신발이 나이키 본사의 판단이 아니라, 철저히 ‘거리’의 선택에 의해 부활해 왕관을 썼다는 점이다.
출시 2년 만에 버려진 신발
미국 대통령 전용기에서 이름을 딴 이 신발은 브루스 킬고어가 디자인한 농구화로, 나이키 역사상 처음으로 농구화에 에어(air) 기술을 넣은 혁신적인 모델이었다. 요즘처럼 혁신적인 기술의 쿠셔닝이 더해진 신발이 넘쳐나는 시대가 아니었기에, 발바닥에 공기가 들어간 농구화라는 사실만으로도 상당히 미래적인 이미지를 지닌 신발이었다.당시 나이키는 모지스 멀론, 마이클 쿠퍼 등 미국프로농구(NBA) 선수들을 모델로 앞세워 에어포스 1을 알렸다. 광고 속 선수들은 우주비행사나 파일럿처럼 연출됐고, 에어포스 1은 단순한 운동화가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장비처럼 보였다. 초기 반응은 좋았다.

그런데 1984년, 나이키는 출시 2년 된 에어포스 1의 생산을 돌연 멈춘다. 당시 스포츠 브랜드들은 과거 모델을 계속 판매하거나 예전 컬러를 복각하는 요즘 같은 방식 자체를 쉽게 상상하지 못했다. 새로운 기술이 들어간 후속 모델을 판매하기 위해서는 이전 모델들을 빠르게 처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에어포스 1의 생산 중단은 나이키 입장에서는 자연스러운 결정이었다. 특히 끊임없이 혁신적인 기술을 선보여야 하는 농구화 시장에서는 빠르게 다음 세대 모델을 내놔야 했다.
그런데 농구장 코트 밖, 특히 미국 동부 볼티모어에서는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곳 젊은이들에게 에어포스 1의 깔끔한 디자인은 당시 스트리트 스타일과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나이키는 에어포스 1을 구형 기술의 농구화로 봤지만, 거리의 소비자들은 패션 아이템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동네 신발 가게들의 반란

단종 소식이 전해지자 볼티모어의 신발 가게에는 에어포스 1을 찾는 소비자가 몰려왔다. 당시 지역 리테일러이던 신데렐라 슈즈, 찰리 루도 스포츠, 다운타운 라커룸, 훗날 ‘스리 아미고스’로 불리게 되는 이 세 신발 가게는 나이키 본사에 직접 재생산을 요청했다.
물론 이 요청을 나이키가 반겼을 리 없다. 이미 생산을 멈춘 구형 신발을 특정 지역의 몇몇 매장을 위해 다시 생산하는 것은 오늘날의 기준으로도 쉬운 일이 아니다. 당시에는 색상당 최소 1200켤레를 주문해야 한다는 조건도 있었다. 안 팔리면 그대로 재고로 쌓였고, 재고는 곧 손실이었다. 그러나 스리 아미고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수많은 이가 에어포스 1을 찾는 모습에서 확신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뚝심은 먹혀들었다. 1985년, 흰색 바탕에 로열 블루 스우시를 얹은 컬러와 초콜릿 브라운 스우시를 얹은 컬러, 총 3000켤레의 에어포스 1이 볼티모어의 세 가게에서 풀렸고 순식간에 품절됐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많이 팔렸다는 사실이 아니다. 이때부터 에어포스 1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소비됐다. 전국 어디서나 똑같이 파는 신발이 아니라, 특정 지역의 특정 매장에 가야만 만날 수 있는 신발이 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한정 발매, 지역 독점, 드롭 문화의 원형이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이후 볼티모어에서는 매달 다른 색상의 에어포스 1이 발매되기 시작했다. 소비자들은 언제 새 컬러가 들어올지 기다렸고, 어느 매장에 풀리는지 정보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이 유행은 근처 워싱턴DC, 필라델피아, 뉴욕으로 퍼졌다. 주말이면 다른 지역 젊은이들이 에어포스 1을 사기 위해 볼티모어로 향했다.
권력이 된 ‘업타운스’
이렇게 살아난 에어포스 1을 진짜 아이콘으로 만든 곳은 뉴욕이었다. 특히 할렘과 브롱크스를 중심으로 한 업타운 문화에서 에어포스 1은 상징적인 신발이었다. 뉴요커들은 이 신발을 ‘업타운스’라고 불렀다. 그냥 별명이 아니라 특정 동네의 취향과 시대 분위기 그리고 거리에서 멋을 증명하는 방식이 그 이름 안에 녹아 있었다. 특히 1990년대 뉴욕에서 올백 에어포스 1을 깨끗하게 신는다는 건 단순히 신발을 아껴 신는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기 관리이자 태도였고, 동시에 조용한 과시였다. 흰 가죽 신발은 한 번만 잘못 밟혀도 티가 나고, 비 오는 날에는 더 조심해야 한다.그래서 올백 에어포스 1은 역설적으로 가장 비실용적인 실용화가 됐다. 어디에나 어울리지만 아무렇게나 신을 수는 없는 신발, 그 모순이 이 신발의 매력이었다. 2000년대 이후 힙합은 이 신발에 더 큰 무대를 열어줬다. 넬리는 ‘에어 포스 원스(Air Force Ones)’라는 곡을 발표해 빌보드 상위권에 올랐고, 로커펠러레코드는 올백 에어포스 1의 뒤축에 자신들의 로고를 새겨 넣었다. 제이지 등 힙합 아이콘들의 발끝에서도 에어포스 1이 보였고, 음악과 뮤직비디오, 거리 패션을 타고 세계로 퍼져나갔다.
에어포스 1의 이야기는 단순한 신발의 성공기를 넘어선다. 우리는 보통 브랜드가 유행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기업이 브랜딩 전략을 수립하고, 광고를 만들고, 유명인을 섭외하면 대중은 그것을 따라간다고 믿는다. 하지만 에어포스 1은 정반대 흐름을 보여준다. 브랜드가 끝났다고 판단한 제품을 지역 매장이 살려냈고, 거리의 소비자가 의미를 붙였으며, 음악과 패션 커뮤니티가 그것을 세계적인 문화 코드로 키워냈다. 강하게 자기주장을 하지 않는 디자인 덕분에 사람들은 이 신발 위에 각자의 이야기를 얹을 수 있었다.
결국 에어포스 1은 나이키가 내려놓았지만, 거리가 다시 집어 올린 신발이다. 볼티모어의 리테일러부터 뉴욕의 업타운과 힙합까지, 수많은 사람이 이 신발을 전 세계 청년 문화의 클래식으로 만들고 퍼뜨렸다. 내일 아침 무심코 올백 에어포스 1을 마주친다면, 조금은 주의 깊게 내려다보자. 이 신발은 사실 한 번 죽었다가 살아난 신발이다. 나이키의 공장에서 태어났지만, 오래전부터 이미 ‘거리의 것’이 된 신발 말이다.
김동섭 크림 마케터(Wave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