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계 반도체 리더들의 전성시대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 리사 수 AMD CEO, 웨이저자 TSMC 회장 등 아시아계 수장이 테크업계를 이끌고 있다. 최근에는 메모리 반도체 호황으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도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1970년대까지 이런 모습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쇼클리반도체를 퇴사해 지금의 실리콘밸리 토대를 닦은 고든 무어와 로버트 노이스 인텔 공동창업자 등 ‘8인의 배신자’는 모두 백인이었다. 인종의 벽은 1984년 한 중국계 창업자가 미국 나스닥시장 상장에 성공하며 깨지기 시작했다. 건식 식각(기체 플라스마로 웨이퍼의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는 공정) 기술로 반도체 장비 회사 램리서치를 세운 데이비드 램이다. 지난 23일 미국 캘리포니아 서니베일의 멀티빔코퍼레이션에서 램 창업자를 만났다. 그는 83세의 고령에도 두 시간 가까운 인터뷰에서 창업 분투기부터 반도체산업의 미래까지 거침없이 풀어냈다. 그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대해 “반도체 미세화가 한계에 부딪혔을 때 첨단 패키징 등으로 변화를 주며 기민하게 대처했기에 AI 시대 리더가 될 자격이 있다”고 말했다.
▷램리서치를 어떻게 창업했습니까.
“1973년 박사학위를 받은 뒤 취업 지원서를 냈는데 다 떨어졌습니다. 오일쇼크 직전이어서 기업들이 채용을 멈춘 때였죠. 전공인 화학공학을 넘어 문을 두드린 곳이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였고, 입사 이후 반도체산업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TI와 제록스, HP를 거친 뒤 창업을 결정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승진에서 밀렸습니다. 제가 일을 가르치던 신참에게 자리를 빼앗겼죠. 그때 아시아계 미국인으로 사는 게 도전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젠슨 황, 리사 수, 립부 탄 같은 롤모델이 당시엔 없었습니다.”
▷경영은 어떻게 준비하셨습니까.
“재무도 마케팅도 영업도 전혀 몰랐습니다. 1979년 한 해 동안 커뮤니티칼리지에서 저녁과 주말에 수업을 들었습니다. HP를 나온 뒤엔 물건을 팔며 세일즈를 배웠습니다.”
▷건식 식각이 사업이 되겠다고 확신한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당시 플라스마 식각은 아침에 좋던 결과가 오후에는 재현되지 않는 점이 문제였습니다. 그 일관성 문제를 우회할 방법을 찾아냈죠. 디지털 제어, 기계적 자동화, 챔버 격리 세 가지를 묶어 1981년 제품을 내놨습니다.”
▷로버트 노이스 인텔 공동창업자의 도움이 컸다고 들었습니다.
“투자자에게 플라스마 식각은 너무 어려운 기술이었습니다. 그들이 제 사업계획서를 노이스에게 보냈고,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뒤 ‘매우 타당하다’고 했습니다. 제품도 없이 계획만 있던 시절인데, 그 한마디로 투자가 성사됐습니다.”
▷램리서치의 식각 시장 점유율이 50%가 넘습니다.
“그저 모든 일이 지속 가능해야 한다고만 생각했습니다. 회사는 작아도 설계와 접근이 단단해야 했고, 모든 고객과 긴밀하게 협력했습니다. 그런 게 쌓여 지금의 결과가 된 것 같습니다.”
▷램리서치, ASML 등 반도체 장비 회사가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됐습니다.
“우리는 금을 캐지 않고 삽을 만듭니다. 골드러시 때 삽을 판 사람도 큰돈을 벌었죠. 그래서 이 산업을 아주 희망적으로 봅니다.”
▷램리서치 경영 당시 한국 반도체 기업은 어땠습니까.
“1980년대 중반까지 한국의 반도체 활동은 미미했고 일본은 메모리에서 매우 강했습니다. 저도 1982년 도쿄일렉트론과 대리점 계약을 맺고 일본 시장을 뚫었을 만큼 일본이 잘나가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1985년 플라자합의가 모든 걸 바꿔놨습니다.”
▷지금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앞서 있습니다. 운명을 가른 건 무엇입니까.
“무어의 법칙(집적 회로의 트랜지스터 개수가 2년마다 두 배씩 늘어난다는 경험칙)이 한계에 부딪쳤습니다. 무어의 법칙이 작동할 때는 트랜지스터 밀도만 높이면 됐습니다.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빛을 볼 기회가 없었죠. 무어의 법칙이 통용되지 않자 기업들이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첨단 패키징과 이종 집적이 주도권을 잡았습니다. 그걸 잘한 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입니다.” 첨단 패키징은 반도체 미세화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칩을 쌓거나 조립하는 기술을, 이종 집적은 다른 공정에서 생산된 반도체를 연결하는 기술을 말한다.
▷인텔 등 기존 강자는 왜 이 흐름을 놓쳤습니까.
“기존 대기업들은 ‘혁신가의 딜레마’에 빠졌지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변화에 기민하게 대처했습니다. AI 시대 리더로서 이 시기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라피더스의 2나노 도전은 어떻게 보십니까.
“잠재력은 좋습니다. 다만 2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 공정은 TSMC와 삼성전자조차 양산에 성공하지 못한 도전적 목표입니다. 오래 쉬다 돌아올 땐 가장 어려운 단계로 바로 뛰어들기보다 차근차근 경험을 다시 쌓는 게 낫습니다. 오늘 베팅한다면 삼성전자와 TSMC가 목표를 달성할 확률이 더 높다고 하겠습니다.”
▷중국 파운드리는 위협이 될까요.
“SMIC가 삼성전자와 TSMC에 위협이 된다고 보지 않습니다. 중국 내부 수요가 워낙 커 외부로 눈을 돌릴 생산 여력 자체가 없습니다. 불행히도 시장은 서방과 중국 두 블록으로 나뉘고 있습니다. 삼성전자는 경험과 자원이 풍부해 거대한 경쟁자를 마주해도 매우 안전할 겁니다.”
▷메모리 칩 부족은 얼마나 지속될까요.
“그래픽처리장치(GPU)와 메모리 칩 부족은 일시적입니다. 대기업들은 이 문제를 알고 있고 빠르게 조정할 수 있습니다.”
▷AI 시대의 진짜 병목은 무엇입니까.
“진짜 우려되는 것은 에너지입니다. 칩과 서버, 데이터센터의 전력 문제를 풀지 못하면 AI는 서서히 멈추거나 성장이 크게 느려질 것입니다. 이를 해결하려면 서로 다른 전문성을 지닌 회사들이 함께 가야 합니다.”
▷어떤 전문성을 말하는 겁니까.
“한 회사로는 안 됩니다. 누군가는 전자를 광자로 바꾸는 트랜시버를 축소하고, 누군가는 더 나은 레이저 주파수를 찾을 것입니다. 또 다른 누군가는 패키징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우리는 노광 회사로서 칩 내부에 그런 패턴을 그립니다. 서로 다른 전문성을 갖춘 회사들이 함께 가야 합니다.”
▷지금의 AI 투자 열기는 지속 가능합니까.
“AI도 자체 사이클을 피할 수 없습니다. 지금 열기는 투자에 쏠려 있는데, 정작 돈을 벌 만큼의 제품은 아직 제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게 실현되기 전까진 불균형이 이어질 것입니다. AI는 장기적으로 남겠지만 개별 기업은 성패가 갈릴 것입니다.”
실리콘밸리=김인엽 특파원 insid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