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나루히토 일왕과 이시바 시게루 전 일본 총리가 벨기에 루벤에 위치한 세계 최대 반도체 연구개발(R&D) 기관 IMEC를 공식 방문했다. 이곳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곽노정 SK하이닉스 대표가 앞서 방문한 첨단 반도체의 최전선으로 꼽힌다. 나루히토 일왕과 총리급 인사가 동시에 이례적으로 특정 산업 연구시설을 방문한 것을 두고 일본 안팎에서는 왕실까지 나서 첨단 반도체 기술외교에 뛰어들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28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양국 수교 160주년을 맞아 벨기에를 방문한 나루히토 일왕은 지난 25일 필립 벨기에 국왕, 이시바 전 총리와 함께 IMEC을 찾았다. 나루히토 일왕은 패트릭 반더나멀 IMEC 최고경영자(CEO)의 안내를 받아 IMEC의 연구시설을 시찰하고, 일본 반도체 기업들과 진행 중인 공동 연구 현황을 보고 받았다. 이후 IMEC에서 연구 중인 일본인 연구자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1984년 설립된 IMEC는 세계 반도체 산업의 미래를 설계하는 연구 허브다. 삼성전자를 비롯해 엔비디아, TSMC, 인텔, ASML 등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이 차세대 공정과 신소재를 공동 연구하는 곳이다. 2나노미터(㎚·1나노는 10억분의 1m)를 넘어 1.4㎚ 이하 초미세 공정 기술의 상당수가 이곳에서 검증되고 표준화된다. 업계에서는 "최첨단 기술이 가장 먼저 태어나는 연구소"라는 평가를 받는다.
현재 100개 국가에서 모인 6000여 명의 연구인력이 국가를 초월한 다국적 연구를 수행하며 3~10년 뒤 상용화될 미래 기술에 집중하고 있다. 벨기에 외에도 네덜란드, 미국, 중국, 일본, 대만, 인도 등 6개국에서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한국에는 연구소가 없다.


이 같은 이유로 이 회장도 지난 2022년 6월 15일(현지시간)에 IMEC을 방문해 당시 IMEC을 이끌고 있돈 루크 반 덴 호브 IMEC CEO와 만나 미래 기술에 대해 논의하고 연구개발 현장을 살펴봤다 이 부회장은 당시 방문에서 최첨단 반도체 공정기술과 AI, 바이오·생명과학, 미래 에너지 등 IMEC가 진행 중인 첨단분야 연구 과제에 대한 소개를 받고 연구개발 현장을 둘러봤다. 2024년 10월에는 곽노정 SK하이닉스가 대표가 IMEC을 찾아 반도체 분야 최신 기술 등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역대 일왕의 해외 순방은 역사·문화 교류가 중심이었지만 나루히토 일왕이 이례적으로 IMEC를 방문한 이유는 일본 국가 반도체 프로젝트인 라피더스와 직결된다. IMEC는 라피더스와 공동 연구를 수행하는 핵심 파트너다. 일본 정부는 첨단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재건을 목표로 수십조 원 규모의 재정을 투입하며 라피더스를 국가 프로젝트로 육성하고 있다.
이시바 전 총리는 재임 당시 2030년까지 반도체와 인공지능(AI) 분야에서 국가 경쟁력 향상을 위해 보조금으로 6조엔을 투자하겠다는 중장기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대부분의 자금은 라피더스를 키워 TSMC와 삼성전자, 인텔이 경쟁하는 첨단 파운드리 시장에서 일본도 본격적으로 경쟁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외교가에선 나루히토 일왕과 이시바 전 총리의 IMEC 방문은 일본이 반도체를 국가 전략산업으로 격상시켰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행보라고 해석하고 있다. 산업적으로는 라피더스의 2나노 개발을 IMEC과의 공동 연구와 글로벌 기술동맹으로 뒷받침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정치적으로는 일왕과 전 총리가 함께 움직이며 반도체를 경제를 넘어 외교·안보를 좌우할 국가 경쟁력의 핵심 자산으로 공식 선언했다는 분석이다.
카트린 마렌트 IMEC 마케팅·커뮤니케이션 총괄 임원(CMO)은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나루히토 일왕이 인공지능(AI)에 굉장히 큰 관심을 보였다는 점"이라며 "첨단 반도체 미세공정 기술부터 차세대 연결성과 컴퓨팅 기술에 이르기까지, AI 시대를 뒷받침할 핵심 기술 기반을 구축하는 데 IMEC가 수행하는 역할에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고 전했다.
이어 "이번 방문은 양국이 신뢰와 협력, 그리고 공동의 발전을 향해 함께 걸어온 여정에 또 하나의 의미 있는 이정표를 세웠다"며 "IMEC는 앞으로도 일본의 산업계와 학계 파트너들과 긴밀히 협력하며 기술 혁신의 한계를 끊임없이 넓혀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강경주 한경닷컴 기자 quraso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