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다론 아제모을루와 제임스 로빈슨 교수는 2012년 출간한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Why Nations Fail)>에서 포용적 제도를 채택한 국가와 그렇지 않은 국가 간 차이를 설명했다. 포용적 제도는 국민에게 재산권과 교육·정치 참여 기회를 보장해 혁신과 ‘창조적 파괴’를 촉진하는 반면, 착취적 제도는 소수 엘리트가 권력과 자원을 독점함으로써 지속 가능한 번영을 가로막는다는 것이다. 경제 성장은 정부가 얼마나 공정한 경쟁과 기회를 보장하느냐에 달려 있으며, 혁신을 허용하는 정치·경제 제도의 산물이라는 게 핵심이다.최근 정부는 5개 발전공기업을 단일 회사로 통합하는 방안을 유력하게 검토하고 있다. 2001년 한국전력에서 발전 부문을 떼어내 발전공기업 5개사와 한국수력원자력으로 분할한 이후 가장 큰 전력산업 구조 개편이다. 당시 발전사를 분할한 경쟁 촉진의 논리는 간데없고, 이제 와서 “왜 5개나 되는 회사가 존재하느냐”는 단편적 문제의식만 남아 있는 상태다. 효율적인 시장 원리에 기반한 제도 운영은 아직 요원한데 53기가와트(GW)의 발전 설비와 직원 1만3000여 명을 거느린 매머드급 발전공기업이 탄생하기 일보 직전이다.
몇 개 회사가 적절한가에 대한 답은 우리 경제 규모와 미래 전력시장의 큰 그림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2000년대 초반과 현재의 한국 경제는 그 규모와 체질 면에서 비교조차 하기 어렵다. 인공지능(AI)과 반도체 등 미래 산업이 부상하고 ‘석유의 시대’가 저물어가는 세계적 에너지 전환 기조 아래 전력산업 자체가 첨단산업화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전력시장 제도 역시 이 같은 흐름을 뒷받침해야 한다. 통합으로 인한 규모의 경제와 비용 절감 효과 역시 효율적인 인적·물적 배치를 전제로 한다. 과감한 구조조정을 통한 합병의 편익이 얼마나 클 것인가는 냉정하게 지켜봐야 할 대목이다.
게다가 통합안을 설계한 회계법인조차 용역보고서에서 단일·거대 기업의 출현이 발전시장의 공정 경쟁을 저해하고 방만 경영을 촉발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시장지배적 사업자가 등장하면 정부는 이 사업자에 사실상 원가 입찰을 강제할 가능성이 높다. 물가 안정이라는 명분 아래 가격은 통제되고, 그 손실은 고스란히 한전과 통합 발전사가 떠안을 것이다. 에너지저장장치(ESS), 수요반응(DR), 가상발전소(VPP) 등 분산·유연성 자원의 신산업 모델 역시 가격 변동성이라는 시장 토양이 사라지면 고사할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정부가 추진하는 재생에너지 중심의 에너지 전환마저 차질을 빚게 된다.
과거에도 에너지공기업이 정치 도구로 전락한 사례가 끊이지 않았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에너지공기업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돈주머니’ 역할을 요구받았다. 그 결과 한전의 누적 부채는 200조원을 넘어섰고, 누적 영업적자 30조원에 연간 이자비용만 4조원에 달한다. ‘2040년 탈석탄’ ‘재생에너지 비중 70%’와 같은 거창한 목표가 경제성 평가를 압도하는 국면에서 조직 내 그 누구도 “이 사업은 수지가 맞지 않는다”고 상식적인 비판을 제기하기 어렵다. 계통 여건과 경제성에 대한 냉정한 평가 없이 정책 의지만으로 추진되는 투자는 또 다른 부실로 귀결될 공산이 크다. 그리고 그 부담은 언제나 국민의 혈세와 전기요금으로 귀착된다.
이번 통합이 진정 미래 에너지 전환을 위한 합리적 설계인지, 아니면 또 한 번 공기업을 정치적 목적에 동원하기 위한 수단인지는 머지않아 결과가 말해줄 것이다. 국가의 성패가 제도에 달렸다는 노벨상 수상자의 경고를 전력산업 대수술을 앞둔 지금, 다시 한번 되새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