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봄 안방극장을 뜨겁게 달군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모자무싸)’를 보며 내 오랜 지하실을 떠올렸다. 세상에 증명하고 싶었던 내 안의 결핍, 그 외로운 싸움은 내가 가난한 집의 ‘남동생을 둔 넷째 딸’로 태어난 것에서 시작된다. 중절 수술 시기를 놓쳐 태어난 딸. 동네 사람들과 친척들은 모두 내 이름 대신 ‘꼭지’라 불렀다. 다음 아이는 꼭 아들이기를 바란다는 뜻이었다.여섯 살 터울의 남동생이 태어나던 날을 지금도 기억한다. 그날 저녁부터 세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갓난아기를 둘러싼 어른들의 웃음과 들뜬 목소리 속에, 막내로 귀여움을 받던 나는 하루아침에 천덕꾸러기가 됐다. 모두가 기다리던 아이는 내가 아니었다. 동생에게 어머니를 빼앗긴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가방도, 숙제도 혼자 챙겨야 했다. 집에서 가장 귀한 아들인 동생이 나를 때려도 손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울기만 했다. 내 안에 ‘태어나지 말아야 했다’는 상처가 단단한 얼음처럼 얼어붙었다.
그 상처를 깨뜨려준 것은 역설적이게도 내가 낳은 아들 둘이었다. 평소 딸을 간절히 원했던 나는 둘째까지 아들이라는 말에 임신 기간 내내 우울해했다. 출산 직후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이의 성기부터 확인했을 정도로 실망이 컸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 첫날 밤부터 둘째 아들이 너무 예뻤다. 첫째 아이 때는 신기하고 소중하면서도 잘 돌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컸는데, 이번엔 마음이 완전히 달랐다. 오물조물 움직이는 손가락, 품에 꼭 안기는 따뜻한 체온. 몇 달 동안 나를 우울하게 했던 존재가 순식간에 가장 소중한 존재가 됐다.
산후조리원에서 집으로 돌아와 첫째는 어린이집에 보내고, 친정어머니와 둘째를 돌보던 날이었다. 내가 둘째를 보며 “어쩌면 이렇게 예쁘냐”고 속삭이자, 어머니가 무심한 듯 따뜻한 한마디를 건네셨다. “사랑은 내리사랑이라 어린 애가 더 예쁜 법이란다. 첫째보다 둘째가 예쁘고, 딸이어도 넷째인 네가 제일 예뻤다.” 순간 목이 메어 와락 눈물이 쏟아졌다. 마음 깊은 곳의 얼음이 봄눈처럼 녹아내렸다. 아들을 바라는 세상은 어머니를 힘들게 했고 딸인 나를 아프게 했지만, 내가 직접 아들 둘을 낳아 그 내리사랑의 신비를 경험해보지 않았다면 결코 믿지 못했을 날것 그대로의 진심이었다.
자식을 낳아보기 전에는 부모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수 없어, 내 미숙한 시각으로 어머니를 오해하고 상처를 키웠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오래된 응어리를 녹여주려고 아들 둘이 내게 왔나 싶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결핍과 싸우며 살아간다. 변호사로 만난 수많은 이들 역시 저마다의 무가치함과 외롭게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안다. 상처는 싸워 이기는 것이 아니라, 삶이 선물한 또 다른 사랑을 통해 마침내 스르르 녹아내리는 것임을.
둘째 아들은 내게 내리사랑을 가르쳐줬고, 어머니를 이해하게 해줬으며, 어린 시절의 나와 화해하게 해줬다. 내 인생 가장 늦은 화해는 어머니와의 화해가 아니었다. ‘사랑받지 못했다’고 믿었던 어린 꼭지와의 화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