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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를 거부한 반항아 쿠르베, 비엔나의 밤을 깨우다 [전시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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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를 거부한 반항아 쿠르베, 비엔나의 밤을 깨우다 [전시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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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엔나의 초여름 밤이 이토록 뜨거웠던 적이 있었을까.

    모차르트와 클림트의 우아한 흔적이 도시를 감싸는 6월, 미술관이 밀집해 있는 뮤지엄콰르티에(MQ)의 레오폴드 미술관은 해가 진 후에도 긴 행렬로 인산인해였다. 구스타브 클림트와 오스카 코코슈카, 에곤 실레의 명작을 보기 위해 관광객이 많이 찾는 이 미술관에 현지인들로 북적인 건 이례적인 일. 오스트리아 역사상 최초로 열린 프랑스 사실주의의 선구자, 구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1819~1877) 대규모 회고전 이야기다.







    지난 2월 19일 개막한 ‘구스타브 쿠르베: 리얼리스트이자 반항아 (REALIST AND REBEL)’은 6월 21일 폐막을 앞두고 약 13만 명 이상의 관람객이 몰렸다. 이 미술관의 연간 방문객은 33만~45만 명. 성수기도 아닌 시즌에 전시 연장 요청이 쇄도하면서 미술관 측은 마지막 나흘 간 이례적인 ‘야간 연장 개장’행사를 열어 밤 9시까지 문을 열었다. 도심 곳곳엔 쿠르베의 명작을 배경으로 한 포스터가 도배됐다. 19세기 미술계를 가장 시끄럽게 했던 반항아는 왜 지금 비엔나 사람들을 열광하게 했을까.

    이번 전시는 한스-페터 비플링거Hans-Peter Wipplinger 예술감독 주도로 회화 90점, 판화 20점, 방대한 아카이브 자료 등 130여 점의 명작이 한자리에 모였다.

    “나에게 천사를 보여달라, 그러면 천사를 그리겠다”

    미술사에서 가장 발칙한 문장으로 남은 이 말은 쿠르베의 예술 세계를 지탱하는 뼈대였다. 당대 학파의 가식적 관습을 향한 선전포고였다. 19세기 프랑스 화단은 신화 속 여신이나 역사적 영웅을 우아하고 이상적으로 미화하는 역사화가 주류였다.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쿠르베에게 그것은 현실을 은폐하는 기만적 위선에 불과했다.




    레오폴드 미술관 지하 1층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관객을 압도하는 것은 그의 대표작들이다. 특히 한쪽 벽면 6m를 채우고 있는 ‘화가의 작업실(L'Atelier du peintre, 1854~1855)’ 앞엔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몰렸다. 인물에 대한 사실주의적 묘사와 다양한 상징, 알레고리가 얽힌 6m에 달하는 대작이다.


    쿠르베의 사상과 삶을 축약한 한 편의 자서전 같은 명작인데, 그림을 그리는 자신의 모습을 중심으로 종교의 위선을 암시한 랍비와 치료사, 방치된 노인을 뜻한 늙은 병사, 빈민을 착취하는 직물 상인, 언론의 퇴폐를 말하는 신문 위 해골 등을 빼곡하게 그려 넣었다. 신화 속의 풍경 대신, 자신의 고향 오르낭의 거친 암벽과 이웃들의 고단한 일상 등 ‘날 것의 현실’을 선택한 쿠르베의 도발적인 시도는 당대 부르주아 사회의 근간을 흔드는 정치적 스캔들이 됐다.





    반항아의 자화상 그리고 신화를 벗겨낸 육체

    <i>“내가 더 이상 논란이 되지 않을 때, 나는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될 것이다.”</i>

    그는 마케팅과 홍보라는 개념조차 없던 19세기 이미 노이즈 마케팅의 본질을 완벽하게 꿰뚫고 있었다. 그는 “나는 하느님처럼 그린다”라거나 “모든 나라의 여성들이 내 편이다”라는 파격적인 어록을 남기며 스스로 스캔들을 제조했다.

    그는 관객의 분노가 곧 돈과 명성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살롱전에서 낙선하면 “덕분에 반항아이미지로 알려져 더 부자가 되겠군”이라며 쾌재를 불렀고, 황제가 자신의 그림을 찢었다거나 사람들이 침을 뱉었다는 루머가 돌면 해명하기는커녕 오히려 부추겼다. 국가가 마련한 살롱전에 기대는 대신, 역사상 최초로 자신의 이름을 건 대규모 개인전을 열어 입장료를 받은 것도 그였다.

    ‘자화상 섹션’과 ‘누드화 섹션’은 그런 그의 면모를 가장 잘 드러내는 공간이다. 초기 명작이자 이번 전시의 아이콘이기도 한 ‘파이프를 문 남자The Man with a Pipe’(1849)는 몽환적인 눈빛으로 파이프 연기를 내뿜으며 보는 이를 응시한다. 단순 기록용 초상화가 아니라, 스스로 사회적 규범에 얽매이지 않는 보헤미안이자 천재적 예술가로 정교하게 ‘셀프 브랜딩’된 자화상이다. 격렬한 감정을 가감없이 드러낸 작품들은 치열했던 청년기를 대변한다.





    쿠르베의 혁명은 누드화와 풍경화에서 그 정점을 이룬다. 미술관의 어두운 조명 아래 배치된 누드화 섹션은 당대 관람객들이 느꼈을 당혹감과 충격을 재현한다. 과거의 화가들이 여성의 나체를 그리기 위해 ‘비너스’나 ‘님프’라는 신화적 방패막이를 세웠던 반면, 쿠르베는 매끄럽게 보정되지 않은, 실제 살집과 탄력을 가진 현실 여성의 신체를 있는 그대로 묘사했다.

    체모와 피부의 질감, 중력을 견뎌내는 육체의 무게감까지 살려낸 그의 누드화는 이상화된 미 기준에 길들여진 대중의 뺨을 때리는 듯한 시각적 충격을 안겼다. 이는 관음증적 시선을 거부하고 인간 신체가 가진 본연의 물질성을 회복하려는 대담한 시도였다.

    사실 쿠르베라는 화가의 거대함에 비해 한국 내 인지도는 다소 제한적이었다. 그 중심에는 늘 ‘음란물 논란’이 자리 잡고 있었다. 여성의 성기를 해부학적 질감으로 가감 없이 근접 묘사한 ‘세상의 기원’(1866)은 지금도 여전히 검열의 대상이 될 만큼 파격적이다. 국내 언론이나 출판물에서도 이 작품을 정면으로 소개하기를 주저해 온 탓에 그의 예술성이 온전히 조명받지 못한 면이 있다.

    그러나 오르세 미술관의 설명대로, 그의 정교한 기교와 호박색 계열의 세련된 미학은 이를 음란물이 아닌 위대한 예술품으로 승화시켰다. 이번 레오폴드 전시에서는 이 장막을 걷어내고 인간 신체 본연의 물질성을 정직하게 응시하려 했던 쿠르베의 숭고한 도전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대중과 비평가들은 쿠르베의 누드화를 두고 “추잡하다”, “외설적이다”라며 비난을 쏟아냈지만, 역설적으로 그 스캔들 덕분에 쿠르베의 이름은 파리 전역에 퍼졌다. 사람들은 그의 '추한 진실'을 보기 위해 전시장에 줄을 섰고, 수많은 소장가가 그의 은밀하고도 강력한 누드화를 비싼 값에 사들이면서 그는 독보적인 명성을 얻게 됐다.

    ‘세상의 기원’의 모델이 누구인가는 160년 간 밝혀지지 않았다가 2018년에야 알려졌다. 파리 오페라 발레단의 댄서 콩스탕스 케니오(Constance Queniaux).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이 소유했던 이 그림은 1995년부터 오르세 미술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인상주의의 할아버지

    지식의 빈곤했던 점은 오히려 쿠르베에게 축복이었다. 편견이 없는 눈을 가졌던 그는 1826년 막 발명된 ‘사진’이라는 신기술에 본능적으로 매료됐다. 과감하게 화면을 잘라내는 크롭(Crop) 기법, 극적인 구도, 빛과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미세한 반사를 캔버스에 이식했다. 이번 전시에 나온 '파도'(1869)에서 볼 수 있듯, 그의 붓끝은 대상을 미화하는 대신 눈앞의 현실을 터질 듯한 물질성으로 포착해 냈다.



    이 날것의 사실주의는 훗날 마네, 모네, 르누아르 등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결정적인 영감을 주었다. 모네가 그린 '풀밭 위의 점심식사' 왼편에 당당히 앉아 있는 인물이 바로 쿠르베. 인상주의자들은 늘 “우리는 쿠르베에게 정말 많은 빚을 졌다”며 그를 ‘인상주의의 할아버지’로 추앙했다. 정확한 이론은 몰랐을지언정, 그의 시각적 본능이 미술사의 패러다임을 바꿨다는 얘기다.

    예술의 영토에서 무소불위의 군주였던 쿠르베는 ‘정치’라는 낯선 세계에 발을 들이며 파멸의 길로 걸어 들어갔다. 1870년, 프랑스 정부의 권위주의를 비판하며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를 단칼에 거절해 민중의 영웅이 되었지만, 정작 아프리카에서 잔혹한 학살을 자행하던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가 준 훈장은 덥석 받아 자랑하고 다니기도 했다.



    비극은 이듬해인 1871년 파리 코뮌 시절에 찾아왔다. 예술위원회 의장이라는 ‘파리 예술의 대통령’ 자리에 앉아 권력에 도취했던 그는, 시민들의 요청에 따라 나폴레옹 제국주의의 상징인 방돔 광장의 청동 기둥을 철거하는 데 동조했다.

    코뮌은 두 달 만에 무너졌고, 새로 들어선 정부와 그동안 그의 오만한 잘난 척에 벼르고 있던 수많은 적들은 쿠르베를 ‘문화유산 파괴의 주범’으로 지목해 모든 죄를 뒤집어씌웠다. 법정은 그에게 기둥 복구 비용으로 32만 3000프랑, 현재 가치로 무려 100억~200억 원에 달하는 벌금형을 선고했다. 54세의 화가에게 33년간 할부로 내라는, 사실상 죽을 때까지 벌금의 노예로 살라는 잔인한 선고였다.

    낚시꾼에게 잡힌 송어처럼… 멜랑콜리로 저문 말년

    전시의 마지막 섹션은 벌금 폭탄을 피해 스위스로 망명한 쿠르베의 비참하고 쓸쓸한 말년을 조망한다. 빚을 갚기 위해 기계처럼 그림을 그려야 했던 이 시기, 그의 화풍은 완전히 뒤바뀐다. 세상을 향해 으르렁거리던 도발과 정치적 상징은 사라지고, 깊은 멜랑콜리가 화면을 지배한다.
    '송어'(1871)는 낚시바늘에 걸려 피를 흘리며 가뿐 숨을 몰아쉬는 물고기를 통해, 정치라는 거대한 덫에 걸려 전 국민의 비웃음거리로 전락한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투영한 가슴 아픈 자화상이다. 그는 결국 스트레스로 인한 간 질환으로 온몸이 퉁퉁 부어오른 채, 1877년 스위스의 차가운 망명지에서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현대 미술사학자들은 쿠르베가 그토록 자부심을 가졌던 정치적 메시지나 복잡한 상징을 담은 사회비판적 그림들에 대해 “거장답지 않게 비유가 1차원적이고 어색하다”며 가장 낮은 평가를 내린다.

    반면, 그가 아무런 생각 없이 오직 천재적인 시각적 본능만으로 그려냈던 풍경화, 자화상, 정직한 누드화는 시대를 초월한 불멸의 걸작으로 칭송받는다. 평론가 샹플뢰리의 말대로 “상징이나 풍자에는 영 재능이 없었던” 그가 정치가 아닌 예술에만 몰두했다면 그의 삶이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가식적인 부르주아 사회의 도덕성에 균열을 내고, 뒤틀린 육체를 정직하게 고백했던 에곤 실레, 리하르트 게르스틀 등이 잠들어 있는 레오폴드 미술관에서 쿠르베의 회고전이 열리는 것은 어쩌면 필연과도 같았다.

    디지털 필터로 가공된 이미지가 범람하는 지금, 가짜 신화를 거부하고 날것의 실재를 마주하려 했던 쿠르베의 투쟁은 시대를 초월한 울림을 준다.



    얼마 전 타계한 오스트리아 대표 화가 게오르그 바젤리츠가 쿠르베의 1854년 작 ‘만남’에서 영감을 받아 오마주한 작품 'B.J.M.C.-Bonjour Monsieur Courbet'(1965)이 전시장에 함께 걸린 이유이기도 하다. 100억 원의 벌금 청구서 앞에서도 꼿꼿이 고개를 들고 서 있던, 이 매력적이고도 비극적인 천재의 진짜 얼굴이 빈에 있었다.

    빈=김보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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