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발굽 자국이 새겨진 복도를 지나면 거대한 만찬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20여명이 둘러앉을 수 있는 긴 테이블 위에는 마구에서 영감을 얻은 식기들이 정갈하게 놓여 있고, 벽면에는 주황빛 실크 스카프가 걸려 있다. 검은 장화와 제복을 갖춰 입은 마부들은 손님을 맞이하며 공간 곳곳에 숨겨진 비밀을 소개한다.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가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 꾸민 ‘미스터리 앳 더 그룸즈’의 첫 모습이다.에르메스가 브랜드 경험을 확장하기 위한 새로운 시도에 나섰다. 서울 중구 DDP에 체험형 전시 ‘미스터리 앳 더 그룸즈’를 선보이면서다. 역사와 장인정신을 보여주는 일방향적 전시에서 벗어나 관람객이 1시간 동안 공간을 누비며 미션을 해결하는 체험형 공간으로 꾸몄다. 브랜드의 가치를 직접 설명하기보다 고객이 몸소 경험하며 느끼도록 한 것이다.
1시간짜리 체험 전시 선보인 에르메스
14일 업계에 따르면 에르메스는 지난 6일부터 DDP에서 무료 전시를 운영하고 있다. 전시관 내부는 관람객이 마구간에서 탈출한 말을 찾아 나서는 콘셉트의 체험형 공간으로 구성됐다. 오는 16일까지 진행되는 이번 전시는 사전 예약을 통해서만 입장할 수 있다. 소요 시간도 약 1시간으로 일반적인 팝업 콘텐츠에 비해 다소 긴 편이다. 그런데도 전시에 대한 수요 몰리면서 사전 예약은 대부분 마감됐으며, 현장에서 자리가 날 때까지 대기하는 워크인 수요도 꽤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소비자들이 이번 전시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단순히 명품 브랜드에 대한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다. 제품을 구매하는 것을 넘어 브랜드의 세계관을 직접 체험하고 싶어 하는 소비문화가 확산한 영향이 크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중심으로 일상을 공유하는 문화가 자리 잡은 데다 물건 자체보다 새롭고 차별화한 경험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해지면서 체험형 콘텐츠에 대한 수요가 늘었다는 설명이다.

이번 전시도 이 같은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마부들이 사는 저택의 문이 열리는 순간 방문객은 사라진 말을 쫓는 ‘탐정’이 된다. 세탁실과 기숙사, 집무실 등 저택 곳곳을 오가며 사건을 추적할 수 있는 단서를 모은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에르메스의 정체성인 마구 공방을 접하게 된다.
실제 공간에는 버킨백과 켈리백 등 대표 제품을 비롯해 말 안장과 재갈, 승마용 모자 등 브랜드를 상징하는 오브제가 곳곳에 배치됐다. 하지만 제품의 이름이나 설명은 적혀 있지 않다. 제품을 전면에 드러내기보다는 브랜드의 역사를 체험 과정에 녹여내 소비자 기억에 자연스럽게 각인시키려는 전략이다.
제품보다 경험…달라진 명품 마케팅 전략
희소성이 곧 자산인 명품 브랜드는 굳이 대중적 마케팅에 열을 올릴 필요가 없다. 그런데도 이 같은 전시를 선보인 것은 ‘브랜드 경험 확대’가 업계의 주요 과제로 떠올랐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럭셔리 시장에서 미래 고객을 확보하는 일이 중요해진 데다 경험을 중시하는 소비 행태가 확산하면서 브랜드의 마케팅 방식에도 변화의 필요성이 커졌다는 얘기다.물론 이전에도 브랜드 경험을 강조하는 업계의 시도는 있었다. 대개 장인정신을 강조하며 제품이 제작되는 과정을 시연하거나, 브랜드의 역사를 담은 오브제를 진열해 두는 식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일방향적 전시에서 벗어나 소비자가 직접 참여하고 몰입할 수 있는 체험형 콘텐츠로 마케팅 방향이 진화하는 추세다. 명품의 가치를 굳이 말로 설명하기보다 고객이 직접 공간을 탐색하고 느끼며 자연스럽게 체화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다른 럭셔리 브랜드도 경험을 강조한 공간을 확대하는 분위기다. 루이비통이 대표적이다. 루이비통은 지난해 11월 서울 중구에 있는 신세계백화점 본점에 6층 규모의 ‘루이비통 비저너리 저니 서울’을 열었다. 제품 판매 공간뿐 아니라 브랜드의 역사와 장인정신을 소개하는 전시 공간, 브랜드 정체성을 반영한 메뉴를 선보이는 레스토랑과 카페 등을 한데 모았다. 건물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체험형 공간인 셈이다.
이 같은 흐름은 더 뚜렷해질 전망이다. 업계 관계자는 “럭셔리 브랜드들이 체험형 전시나 복합공간 등에 투자하는 것은 단기적인 판매 확대보다 장기적 브랜드 선호도를 높이기 위한 목적이 크다”며 “고객이 브랜드 세계관에 몰입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경쟁력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박수림 한경닷컴 기자 paksr36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