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권시장보다 커진 주식시장

11일 증권업계에 따르면 채권시장 시총은 주식시장의 49% 수준인 것으로 집계됐다. 채권은 주식보다 시장 규모가 큰 것이 일반적이다. 연기금과 은행 등 주요 기관투자가는 수익률 관리를 위해 채권을 대거 편입하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두 자산의 역전 현상이 나타난 시기는 ‘정보기술(IT) 거품’으로 유가증권시장이 과열된 1999년 12월,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인 2007년 6~12월, 반도체·철강주 랠리가 지속되던 2018년 1월 등으로 매우 짧다. 채권시장이 주식시장보다 큰 건 다른 나라도 비슷하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2024년 말 글로벌 채권시장 규모는 150조달러로, 전 세계 거래소 상장 주식 시총(137조달러)보다 10%가량 컸다.
최근의 주식·채권시장 역전 현상은 지난해 10월부터 시작됐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중심으로 반도체주가 급등하면서 주식 시총이 크게 불어났다. 반면 채권시장은 금리 상승 영향으로 채권값이 떨어지고, 발행액도 급감했다. 이번 역전 현상은 9개월째 이어지고 있다. 기존 기록인 7개월(2007년)을 넘어섰다.
국내 채권시장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국채다. 시총이 전체 채권 시총의 38.96%에 해당하는 1327조원에 이른다. 금융채가 674조원으로 19.79%, 회사채가 462조원으로 13.56%를 차지하고 있다. 국채 잔액은 2016년 5월 587조원에서 1327조원으로 가장 빠르게 증가했다. 반면 회사채와 금융채 등 민간 채권시장 성장세는 10년째 정체돼 있다.
금리 상승세가 가팔라진 올해 들어선 회사채 시장이 급격히 축소되고 있다. 1~5월 회사채 발행 규모는 56조219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65조9427억원)보다 15% 감소했다. 금리가 큰 폭으로 오르면서 투자 수요 약화와 기업 발행 유인 감소가 맞물렸다는 분석이다. 현재 신용등급 AA-급 대기업의 은행 대출금리는 연 3.7~3.9% 수준인데, 회사채 발행금리는 연 4.4%를 웃돌고 있다. 은행 대출이 회사채 발행보다 약 0.5%포인트 저렴하다. 은행 대신 채권시장 문을 두드릴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회사채 발행시장에서는 미매각 사례가 나오고 있다. 동화기업(BBB+)은 지난달 400억원 규모의 회사채 발행에 나섰지만, 전량 미매각됐다.
채권업계 관계자는 “저위험 자산인 채권시장이 비정상적으로 쪼그라들면 기관투자가의 수익률 관리가 힘들어지는 등 자본시장 전반의 안전성이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며 “특히 회사채 시장의 위축은 우려스러운 수준”이라고 말했다.
◇반도체 호황이 금리 압력 키우나
시장에서는 채권시장 정체가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구조적 변화일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과거에는 금리가 상승하면 주가가 압박받는 흐름이 나타났지만, 최근에는 인공지능(AI) 반도체 랠리로 주식시장 시가총액이 오히려 커지고 있다. 반면 채권시장은 국고채를 제외한 민간 부문 채권 증가세가 둔화하고 있다. 기업 자금 조달 시장의 구조 자체가 바뀌고 있는 영향이다.반도체 호황이 금리 인상을 부추길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대기업 실적 개선에 따른 임직원 성과급 확대가 물가를 자극하고, 이런 흐름이 금리 인상을 부추길 수 있다는 논리다.
이성호 NH투자증권 글로벌FI본부장은 “AI 반도체 호황과 수출 개선으로 한국의 경기 회복 압력이 미국보다 더 강해질 수 있다”며 “한국은행이 금리를 빠르게 올릴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배정철 기자 bj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