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이 펜 한자루로 목줄을 죄는 ‘초크포인트’ 제재 목표물 맨 상단에는 러시아 석유가 올라와 있다. 러시아 경제에서 에너지 의존도는 절대적이다. 2023년 기준 석유와 천연가스 등 에너지 산업은 국내총생산(GDP)의 약 3분의 1, 연방 재정 수입의 30~50%, 수출액의 65%를 각각 차지했다. 소련 붕괴 뒤 혼란, 2000년대 에너지값 폭등과 금융위기, 2014년 크림반도 병합으로 가해진 서방의 제재로 산업 다각화 등 경제 구조 전환에 실패한 결과다.
대외 제재 수단을 짜내는 미국 재무부 해외자산통제국은 이 점을 노렸다. 크림반도를 병합한 핵강국 러시아와 무력 전쟁을 벌일 준비가 돼 있지 않은 미국은 에너지 제재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순탄치는 않았다. 국제유가와 가스값 폭등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어 버락 오바마 행정부 내에서도 신중론이 적지 않았다. 러시아 가스 의존도가 높은 유럽은 반발했다.
이 때문에 미국의 제재는 다소 어정쩡한 수준에 머물렀다. 오바마 행정부는 세 차례 행정명령을 내렸다. 1차적으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측근, 당국자들에게 미국내 자산 동결, 여행 금지 조치를 취했다. 2단계로 부문별 제재에 나서 러시아 2개 은행과 2개 에너지 기업의 신규 부채와 신규 지분에 대한 미국인의 거래를 제한했다. 3단계로는 방산 기업 신규 부채 거래 금지, 추가 은행 제재, 심해·북극·셰일 석유 생산에 필요한 재화와 기술의 러시아 수출 금지 등 조치를 내렸다.
유가 우려해 석유 제재 빼자 푸틴 야욕 실행 나서
핵심인 에너지 수출 차단은 빠졌다. 유럽 동맹과의 결속을 해칠 수 있고 역시 에너지값 폭등을 우려한 것이다. 러시아 은행들의 금융결제망(SWIFT) 배제 같은 핵심 제재도 리스트에 올리지 않았다. 부문별 제재라는 용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무도 몰랐고, 그저 말뿐이었으며, 푸틴은 동요하지 않았다(에드워드 피시먼 ‘국가는 무엇으로 싸우는가’).
다른 이유로 러시아는 위기를 맞았다. 미국의 셰일 석유 공급 증가로 유가가 하락하면서다. 루블화 폭락으로 러시아 경제가 휘청했다. 푸틴은 대응에 나섰다. 미국의 제재에 SWIFT를 대체한 자체 금융정보 전송시스템(SPFS)을 출범시켰다. 독일과 프랑스는 러시아 경제 악화가 자국으로 번질 것을 우려해 미국의 추가 제재에 반대했다. 유럽연합(EU)의 제재 연장은 단행되지 못했다. 고강도 경제제재로 인한 부담을 지려 하지 않은 것이다. 유럽은 푸틴의 크림반도 합병 이후 러시아 가스와 석유 의존도를 낮추는 노력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높였다.
서구를 과소평가한 푸틴이 본격적으로 우크라이나 침공 의지를 드러내면서 미국은 제재 강도를 높여갔다. 하지만 여전히 미국과 유럽은 에너지 시장을 흔들 우려 때문에 러시아의 석유·가스 거래는 금융제재 면제 대상에 올렸다. 푸틴이 우크라이나 침공 계획 발표 직후에도 유럽은 가스 대금을 러시아에 송금하기도 했다. 서구의 유약함을 확인한 푸틴은 우크라이나를 확보하려는 ‘노보로시아(신러시아)’ 야욕을 실행으로 옮겨가게 된다.
그러나 러시아가 2022년 2월 막상 우크라이나 침공을 감행한 이후엔 상황이 달라졌다. 푸틴의 야욕이 나토 국가들로도 향할 수 있다는 우려를 한 유럽은 뒤늦게 에너지 제재에 발동을 걸었다. 전쟁 발발 3개월 뒤 유럽은 6개월 내 러시아산 석유 구매의 약 90%를 단계적으로 줄이기로 했다. 러시아와 독일을 잇는 노르트스트림 가스라인 1, 2 모두 봉쇄됐다. 튀르키예를 잇는 가스관을 제외하고 다른 러시아~유럽 연결 가스관도 차단됐다.
12월엔 미국과 EU는 러시아산 원유에 ‘가격상한제’ 제재 조치를 취했다. 러시아는 당시 세계 석유의 약 10%를 공급하고 있었다. 배럴당 60달러가 넘는 러시아산 원유는 구매할 수 없도록 했다. 60달러를 넘을 경우 해상 보험과 수출입 금융 등을 하지 못하게 했다. 가격상한제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치솟는 유가를 안정시킨다는 명분이었다. 실제론 러시아가 석유 판매를 통해 얻는 수입으로 우크라이나 전쟁 비용을 충당하는 것을 저지하는 게 주목적이었다. 해상 보험과 달러 결제망 등 미국과 EU가 장악한 해운 인프라를 무기로 활용해 러시아에 타격을 주려는 것이었다.
가격상한제에 러 ‘그림자 함대’ 전략으로 회피
가격상한제는 미국과 EU의 고민의 산물이었다. 러시아산 수입 금지라는 초강경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일부 강경론도 있었다. 이럴 경우 러시아에 치명타를 안길 수 있지만 이번에도 국제유가 폭등 우려가 발목을 잡으면서 이 정도에서 타협했다. ‘스마트 제재’라는 이름이 붙었다. 가격상한제 제재는 초기 효과를 보았다. 창이 예리해지면 방패도 더 두꺼워지는 법. 시간이 지나면서 약발이 떨어졌다. 러시아는 ‘그림자 함대(Shadow Fleet)’ 전략으로 회피했다. 가격상한을 넘는 원유를 수출할 때 이용하는 수백 척의 비공식 불법 선박 네트워크를 뜻한다. 노후 유조선을 대거 사들여 선박 서류를 위조하거나 자동식별 장치를 조작하고 공해상에서 환적하는 등 다양한 수법이 동원된다. 제재 대상 항구를 우회해 수출하기도 한다.
러시아는 중국과 인도에 독자 수출망을 구축했다. 두 나라 모두 경제성장으로 에너지 소비가 급증하는 상황에서 보다 저렴하게 러시아 원유를 수입할 수 있고 러시아로서도 돈줄을 챙길 수 있어 서로 ‘윈-윈’ 구조다. 러시아가 제재를 회피해 중국과 인도로 우회 수출한 물량은 러시아 전체 석유 수출의 90%에 달한다(양수영 ‘세계 에너지 패권 전쟁’). 2025년 유가가 하락하자 EU와 영국, 캐나다가 상한을 배럴당 47.6달러로 더 낮추려 했으나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동참하지 않아 균열을 낳았다. 그러자 EU는 자체적으로 배럴당 44.1달러로 낮췄으나 이란 전쟁 발발로 제한 완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미국은 이란 전쟁으로 인한 유가 급등으로 러시아산 원유에 대해 일시적 제재 완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러시아 석유 제재 효과는 반타작에 그쳤다. 피시먼은 “G7이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석유 제재를 우크라이나 전쟁 시작 후로 미룬 것”이라고 지적했다.
시리즈를 통해 석유가 지난 100년 동안 국제외교 안보질서를 규정하는 핵심 변수인 사례들을 살펴봤다. 에너지는 세계경제를 좌우하는 ‘욕망과 권력’이다(최지웅 ‘석유제국의 미래’). 앞으로도 석유가 그런 파워의 중심축을 유지할 수 있을까. 석유 종말이 곧 닥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그 예상은 오판이라는 게 다수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전기차가 늘어나고 재생에너지로의 전환도 속도를 내고 있지만 석유 대체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전체 석유 소비 중 승용차 비중은 4분의 1에 그친다. 나머지는 당장 석유 대체가 힘든 대형트럭, 항공, 플라스틱을 비롯한 석유화학 등이 차지하는데 이 부문 수요가 여전히 견고하다.
중국의 전기차 생산량이 세계 1위로 올라섰지만 석유 소비가 급증하면서 탄소배출량도 역시 압도적인 세계 1위다. 석유 소비는 자국 생산량보다 세 배 많다. 재생에너지 부문에서 뒤처진 신흥국들의 석유 소비도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이 때문에 ‘피크오일’ 시점은 더 늦춰지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석유 수요 정점 시기를 당초 2030년에서 2050년으로 늦춘 시나리오도 내놨다.
홍영식 한국핵안보전략포럼 운영위원(전 한국경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