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발생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재선거 요구 시위로 번지는 가운데 선거 실무를 책임져야 할 선관위 직원들이 선거철마다 대거 휴직에 들어가는 고질적인 병폐가 수면 위로 드러났다.
격무가 예상되는 선거 시기만 되면 휴직자가 급증했다가 선거가 끝나면 일터로 복귀하는 이른바 '선거 도피성 휴직'이 총체적인 선거 부실 관리로 이어졌다는 지적이다.
선관위 자료에 따르면, 올해 지방선거를 목전에 둔 2026년 4월 기준 선관위 휴직자 수는 무려 176명에 달한 것으로 파악됐다. 이는 최근 10년 사이 두 번째로 많은 수치다. 사유별로는 육아휴직(124명)이 가장 많았고, 일반질병휴직(30명), 가족돌봄휴직(11명) 등이 뒤를 이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휴직 급증이 이번 선거만의 우연이 아니라, 큰 선거가 있을 때마다 '계획적'으로 반복돼 왔다는 점이다. 실제로 과거 주요 선거철마다 기묘한 휴직자 등락 패턴이 확인됐다.
2020년 제21대 총선 때는 선거 직전인 4월 127명까지 치솟았던 휴직자가 총선이 끝나자마자 7월 101명, 9월엔 92명으로 급감했다.
2022년 대선 및 지방선거 당시에는 양대 선거가 겹치며 격무가 예상되자 휴직자 수가 226명까지 폭증하며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2024년 제22대 총선 때는 상반기 내내 170명 안팎을 유지하던 휴직자가 선거가 끝난 7월이 되자마자 120명대로 뚝 떨어졌다.
이러한 선거철 휴직의 피해는 고스란히 투·개표 현장으로 이어졌다. 전체 휴직자 176명 중 실제 선거 준비와 현장 실무를 총괄하는 시·도 선관위 소속 인력이 114명으로 대부분을 차지했다.
현장 숙련도가 높은 인력이 선거 기간에 대거 자리를 비우면서 사전투표 장비 점검 및 관리 부실, 투표용지 수요 예측 및 보관 실패, 현장 개표 절차 지연과 선거법 위반 민원 대응 마비 등 핵심 업무에 심각한 공백이 발생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선관위 역시 이 같은 고질적인 인력 이탈 문제를 인지하고 있었다. 선관위는 올해 선거를 앞두고 각 시·도 선관위에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 불요불급한 휴직은 자제하라"는 이례적인 내부 지침(공문)까지 발송했다.
하지만 이런 경고도 소용없었다. 선관위는 인력 부족을 이유로 신규 공개 채용 규모를 2022년 24명에서 2024년 121명, 2026년 108명 등 매년 대폭 늘려왔다. 그러나 정작 가장 중요한 선거 시기에 기존 숙련 직원이 대거 이탈하면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으로 조직이 운영돼 왔음이 증명된 셈이다.
김민석 국무총리는 SNS를 통해 "선관위의 투표용지 부족 사태는 K-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자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라며, "수사를 포함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을 묻겠다"고 강력한 경고 메시지를 냈다.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 역시 국회 차원의 전면적인 국정조사를 요구하고 나섰다. 이 대표는 여당인 민주당을 향해 "국정조사를 질질 끌며 회피할 경우, 정부 수사기관에 대한 불신과 맞물려 특검 도입 요구가 폭발할 것"이라며 즉각적인 진상 파악을 압박했다.
국가공무원법상 보장된 휴직 권리를 제한할 수는 없지만, 국가의 근간인 선거 업무를 대하는 선관위의 내부 기강 해이와 구조적 직무유기가 이번 참사를 불렀다는 비판은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6·3 지방선거 일부 투표소에서 발생한 투표용지 부족 사태의 후폭풍이 대학가로 번지고 있다. 서울 주요 대학 총학생회가 중앙선거관리위원회를 규탄하는 성명을 내거나 대응 논의에 들어갔다.
전국 100여 개 대학 총학생회로 구성된 전국총학생회협의회는 5일 성명서를 내며 "선거를 관리하는 헌법기관이 국민의 한 표를 온전히 보장하지 못하는 것은 국민주권에 대한 중대한 책무 방기이자 도전"이라며 "이런 행위는 국민이 어렵게 지켜온 참정권을 강탈한 것으로 전국의 대학생 대표들은 민주주의를 지켜온 학생자치의 이름으로 침묵할 수 없다"고 항의했다.
이외에 개별 대학교에서도 성명문을 잇달아 발표했다. 한국외대·경희대·서울시립대·경기대를 시작으로 서울대·연세대·고려대·서강대·성균관대·중앙대·동국대·명지대·상명대·인하대·가톨릭대·경기대·전남대·부산대·충북대·순천향대 등에서도 대자보와 성명을 통해 선관위를 향해 규탄을 이어갔다.
선관위에 따르면 3일 지방선거와 국회의원 재·보궐선거 본투표일에 서울 송파구 12곳, 강남구와 광진구 각 1곳 투표소에서 투표용지가 부족해 투표가 일시 중단됐다. 선관위는 투표용지를 추가 공급한 뒤 투표 시간을 연장했지만 이번 사태가 선거 연기나 재선거 사유에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미나 한경닷컴 기자 help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