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유의 냄새가 있었습니다. 1990년대 지하철 1호선 용산역 개찰구를 빠져나와 나진상가와 선인상가로 이어지는 길고 어두운 구름다리를 건널 때 코끝을 찌르던 냄새 말입니다. 매캐한 납땜 연기, 땀 냄새, 개봉하지 않은 기계 부품의 박스 냄새와 먼지가 뒤섞인 그 공기는 소년들에게 일종의 ‘해방구’로 진입하는 신호였습니다.
당시의 용산전자상가는 단순히 전자제품을 파는 시장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어른들의 관성적 통제를 벗어나 첨단 IT 기기들이 뿜어내는 도파민을 온몸으로 호흡할 수 있는 거대한 ‘던전’이었습니다. 당시 또래들은 이곳을 ‘용던’이라 불렀습니다. 복잡한 미로 같은 구조, 호객꾼들의 살벌한 영업, 시세를 모르면 순식간에 당할 것 같은 긴장감. 그 동네를 좀 아는 길잡이 친구와 동행하지 않고는 살아 돌아오기 어려운 진짜 던전이었습니다.
그 시절 제게 용산은 제2의 고향이었습니다. 지방에서 올라와 같이 놀 친구도 마땅치 않던 대학 1학년생에게 용산은 언제나 새로운 세상을 보여줬습니다. 부모님께서 보내주신 생활비가 입금되는 날이면 심장이 뛰었습니다. 가장 먼저 발길이 닿은 곳은 나진상가의 게임 골목이었습니다. <파이널 판타지>, <버추어 파이터>, <슈퍼로봇대전>, <위닝 일레븐> 같은 신작 게임 CD의 비닐을 뜯을 때의 설렘은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즐거움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용산의 탐험 영역은 점차 넓어졌습니다. 빛나는 소니와 파나소닉의 CD플레이어를 고르고, 조금 더 좋은 음질을 듣겠다며 여러 개의 이어폰을 일일이 청음하던 기억. 세상의 풍경을 나만의 프레임에 담고 싶어 번들 렌즈가 달린 디지털카메라를 흥정하던 순간. 군대를 다녀온 뒤에는 전자랜드 상층부 깊숙한 곳에 자리한 오디오 매장을 서성이기 시작했습니다. 매킨토시 앰프의 푸른 불빛과 B&W 스피커의 울림을 부러워하며 조금씩 어른이 되어갔습니다. CD플레이어의 미세한 레이저 렌즈부터 하이엔드 오디오의 육중한 알루미늄 노브까지 제 인생의 감각적 연대기는 상당 부분 용산이라는 물리적 공간에 빚을 지고 있습니다.
용산에서 사 온 신작 게임 CD 중 게임기가 아닌 컴퓨터에서 돌아가는 CD를 제대로 구동하려면 언제나 하드웨어 업그레이드가 필요했습니다. 3D 폴리곤으로 구현된 가상 세계가 뚝뚝 끊기지 않고 매끄럽게 흘러가도록 만들기 위해 선인상가 조립 PC 매장을 뒤졌습니다. 그렇게 구해낸 엔비디아의 ‘리바 TNT’나 ‘지포스’ 카드를 메인보드에 꽂았습니다. 케이스를 열고, 먼지를 털고, 슬롯에 힘주어 꽂고, 드라이버를 설치하던 그 순간의 긴장감은 작은 의식에 가까웠습니다.
당시에는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용산 던전의 악명 높은 판매업자들과 “얼마까지 보고 오셨어요?”라는 심리전을 벌이며 필사적으로 손에 넣으려 했던 그 제품을 설계한 회사가 훗날 전 세계 자본시장의 왕좌에 오를 줄은 말입니다.
그 녹색 상자의 주인공은 바로 대만계 미국인 젠슨 황이 이끄는 엔비디아였습니다. 지금 한국은 물론 전 세계를 들썩이게 하는 바로 그 회사입니다.
젠슨 황은 처음부터 화려한 소비자 서비스나 플랫폼 제국을 꿈꾼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래픽과 병렬 연산의 가능성에 집착했습니다. 게임 속 화염 마법의 입자를 더 사실적으로 뿌리고, 괴물의 피부 질감을 더 생생하게 묘사하고, 가상 세계의 움직임을 더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벼려낸 GPU는 훗날 인류 문명을 바꾸는 반전의 불씨가 됐습니다. 화면 속 픽셀 수백만 개를 동시에 계산하던 그 ‘게임용 하드웨어’의 메커니즘이 30년 뒤 인공지능(AI)의 거대언어모델을 학습시키는 핵심 인프라로 재정의된 것입니다. 소년들이 게임 CD를 돌리며 환호하던 그 짜릿한 가속도가 오늘날 한때 시가총액 5조5000억달러를 넘어선 테크 제국 엔비디아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지금의 용산전자상가는 쇠락했습니다. 오프라인 매장은 비었고, 소년들이 가득했던 던전의 터는 도시 재생과 초고층 개발이라는 거대한 자본의 포클레인 앞에 선 처지가 됐습니다. 하지만 물리적 공간은 사라질지언정 하드웨어가 가진 정직한 힘과 그 가치는 젠슨 황이라는 신화를 통해 가장 화려한 형태로 복권됐습니다. 젠슨 황은 기술의 겉포장에 취하지 않았습니다. 수십 년간 ‘세상을 계산하게 만드는 기계’라는 한 우물을 파 내려갔고, 마침내 AI 시대의 가장 좁고 강력한 협로를 장악했습니다.
용산의 추억은 단순한 노스탤지어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부품 하나, 선재 하나, 칩 하나에 집착하며 최고의 성능을 뽑아내려 했던 하드웨어 마니아들의 고향이었습니다. 더 빠르게, 더 선명하게, 더 정확하게 작동하는 세계를 향한 집요한 욕망의 현장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욕망이 지금 AI 시대의 산업 질서를 다시 쓰고 있습니다.
이번 주 칼럼을 쓰며 새삼 그때를 다시 생각합니다. 우리의 비즈니스는 지금 세상의 트렌드라는 가벼운 바람에 흔들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젠슨 황의 칩셋처럼 세상을 밑바닥에서부터 지탱하는 단단한 중심축을 벼려내고 있습니까. 한국 기업들은 지금 자기들만의 GPU를, 자기들만의 하드웨어 해자를 만들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저 젠슨 황과 사진 한 장 더 찍기 위해 온갖 연락망을 가동하고 있습니까.
용산 던전을 누비던 수많은 소년들이 그리워지는 맑은 유월의 오후입니다.
이홍표 한경비즈니스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