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 무용수 출신의 첫 아내 올가 코클로바와 함께한 시기에는 우아한 신고전주의를, 관능적인 젊은 연인 마리테레즈 발테르를 만난 뒤에는 부드러운 곡선과 밝고 따뜻한 색채의 화풍을 택했다. 도발적인 성격의 사진작가 도라 마르와 함께한 시기에는 선이 날카로워지고 색이 어두워졌다. 피카소에게 새로운 사랑은 곧 새로운 양식의 시작이었다.

'책 읽는 소녀'(1938)는 발테르와 마르 사이에 걸쳐 있는 그림이다. 1927년 파리 길거리에서 열일곱 살의 발테르를 만난 유부남 피카소는 그녀를 유혹했다. 이후 발테르는 약 10년간 피카소의 연인이자 뮤즈가 됐고, 1935년에는 딸 마야를 낳았다. 그런데 1936년 마르와 새로운 관계가 시작됐다. 마르는 지적이고 날카로운 성격의 소유자였다.
마르와 만나고 있었지만 발테르와의 관계도 지속하던 1938년, 두 여인 사이에서 피카소가 그린 작품이 '책 읽는 소녀'다. 얼굴의 윤곽과 주변 공간의 양감은 아직 발테르 시기의 부드러움을 간직하고 있다. 반면 날카로운 색조 대비는 마르 시기에 가깝다. 그림의 모델이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려져있지 않다.
이 그림은 피카소의 입체주의가 무엇인지를 가장 알기 쉽게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정면과 측면이 동시에 보이는 얼굴, 평면으로 압축된 공간은 입체주의 화풍 그대로다. 책을 읽는 소녀라는 일상적인 장면을 왜 이렇게 왜곡해서 그렸을까. 피카소는 말했다. "얼굴이란 무엇인가. 앞에서 본 것인가, 안에서 본 것인가, 뒤에서 본 것인가." 앞모습과 옆모습을 비롯해 한 사람에 대해 알고 있는 여러 사실들을 한 화면에 동시에 담으려 한 시도가 입체주의라는 뜻이다.
피카소는 스페인 내전의 참상을 그린 걸작 '게르니카'를 그린 바로 다음해에 이 그림을 그렸다. 작품을 소장 중인 미국 디트로이트미술관은 "소녀가 들고 있는 책은 지식, 침묵, 사색의 상징"이라며 "폭력과 혼란의 시대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이 작품은 미국의 자동차왕 헨리 포드의 손녀인 조세핀 클레이 포드가 소장하다 사후 디트로이트미술관에 기증한 것이다. 오는 28일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개막하는 전시에서 이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전시장에서 이 그림 앞에 선다면 소녀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길 권한다. 처음에는 기괴한 변형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대상을 온전히 알고 표현하기 위한 피카소의 노력을 읽을 수 있다.
성수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