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6일 서울 롯데콘서트홀.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2년 만에 선보이는 국내 리사이틀의 막이 올랐다.
그 역시 이 무대를 고대해온 것일까. 무대에 오른 임윤찬은 관객을 향해 꾸벅하고 인사를 한 번 건네고는 곧장 피아노로 향했다. 자세를 고쳐 앉거나 호흡을 고르는 겨를도 없이 바로 연주를 시작했다. 그는 건반 위로 곧장 몸을 내던졌고, 관객은 속수무책으로 그가 설계한 음악의 심연으로 빠져들었다.
이날 공연은 임윤찬이 기획한 레퍼토리로 꾸려졌다. 1부는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17번 ‘가슈타이너’, 2부는 스크랴빈의 피아노 소나타 2·3·4번으로 채웠다. 스크랴빈의 피아노 소나타 2번은 그가 2022년 밴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역대 최연소 우승을 거머쥘 당시 2라운드에서 선보인 작품이다.
하지만 두 작곡가를 향한 그의 애정은 뿌리가 더 깊다. 임윤찬은 13세이던 2017년 금호영재콘서트에서 슈베르트(피아노 소나타 14번)와 스크랴빈(피아노를 위한 24개의 프렐류드)의 세계를 탐구했다. “일시적 성공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을 견디고 기억에 남는 작업을 남기고 싶다”던 그는 어린 시절 마주한 두 거장의 세계를 더 깊게 파고들었다.
1부에선 임윤찬 특유의 담대한 터치가 돋보였다. ‘슈베르트 작품은 서정적으로 풀어내야 한다’는 편견을 깨부순 무대였다. 특히 3악장에선 들판을 뛰노는 강아지를 그리듯 경쾌하고 장난스러운 선율을 풀어내다가도 이내 묵직한 저음으로 분위기를 단숨에 뒤바꿔놨다.
2부에서 임윤찬은 스크랴빈의 세계를 통째로 펼쳐 보였다. 낭만주의에서 신비주의로 서서히 옮겨가는 스크랴빈의 변화를 단숨에 보여준다는 의지인 듯, 악장과 악장 사이조차 숨 돌릴 틈을 허용하지 않고 스스로 몰아붙였다. ‘환상 소나타’로 불리는 소나타 2번에서 그는 시리도록 아름다운 초겨울 바다를 구현했다. 이 작품은 스크랴빈이 1892년 라트비아에서 처음 바다를 접한 뒤 받은 영감에서 태어났다. 임윤찬의 왼손은 깊고 너른 바다의 수평선을 깔았고, 오른손은 물결 위에서 반짝이는 윤슬을 수놓았다. 2악장에 들어서자 그의 타건은 한층 빨라지며 심해의 어둠과 거친 폭풍을 그려냈다.
임윤찬은 소나타 3번부터 본격적인 질주를 시작했다. 객석에서 바라본 그의 뒷모습은 마치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내달리는 바이커와 같았다. 장발을 세차게 흔들고 발을 구르면서도 신들린 연주를 이어 나갔다. 불규칙한 화음이 쏟아지는 이날 공연의 백미, 소나타 4번 마지막 악장이 끝나자 객석에선 참았던 탄성이 옅게 터져 나왔다.
그는 라흐마니노프의 ‘보칼리제’로 이날 공연을 장식했다. 본공연에서 보여준 거침없는 테크닉과 폭발적 에너지를 뒤로하고 서정성까지 더한 완벽한 마무리였다. 그의 투어는 오는 13일까지 대구, 부산, 통영, 서울, 인천 등에서 이어진다.
허세민 기자 se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