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베네치아비엔날레 국가관 전시가 열린 이탈리아 베네치아 자르디니 공원 러시아관 앞. 분홍색 복면을 쓴 시위대 수십 명이 시끄러운 록 음악에 맞춰 우크라이나 국기 색깔인 푸른색·노란색 연막을 피워 올렸다. 이들은 약 30분간 러시아관 입구를 봉쇄하고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을 비판하는 시위를 벌였다. 정치·외교 논쟁이 두드러진 이번 비엔날레의 분위기를 한눈에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새로운 예술은 늘 세상의 질서가 흔들릴 때 탄생했다. 1800년대 후반 서구의 번영과 사진술의 발달은 인상주의를 꽃피웠다. 휘청이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불안한 번영 속에서 빈 분리파를 낳았고, 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 냉전의 시작에서 잭슨 폴록을 위시한 현대미술이 태어났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란 전쟁이 계속되며 냉전 이후 세계 질서가 흔들리고 있는 지금이 바로 그런 시기다. 그 변화의 조짐은 세계 최고 권위의 국제미술제인 베네치아비엔날레에서 가장 먼저 감지되고 있다.
올해 61회째를 맞은 비엔날레는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한 정치 논쟁의 무대가 됐다.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최고 영예인 황금사자상 시상을 결정하는 심사위원단이 개막 직전 전원 사퇴한 것이다. 전쟁 범죄를 저지른 러시아·이스라엘에 상을 줄 수 없다는 게 이유다.
결국 비엔날레 측은 황금사자상 시상 자체를 폐지하고, 폐막일인 11월 22일 일반 관객 투표로 최우수 작가와 최우수 국가관을 뽑는 ‘관객상’을 신설해야 했다. 131년 비엔날레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국가관 전시에서는 비상계엄 사태를 주제로 한 한국관을 비롯해 여러 국가관이 정치적 주제를 정면으로 다뤘다. 한편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가 흔들리고 다극화가 진행되는 흐름도 비엔날레에 그대로 반영됐다.
카타르는 ‘오일 머니’를 앞세워 자르디니 공원 내에 전통 아랍풍 문양의 공간을 마련했다. 엘살바도르는 1995년 한국관 이후 30년 만에 주요 전시장 중 한 곳인 팔라초 모라에 신축 국가관을 만들었다. 본전시에서도 그동안 현대미술계에서 존재감이 미약했던 중동·아프리카·남미 작가들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지금 세상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앞으로 미술은 어떻게 변할까. 그 변화의 조짐을 아르떼가 비엔날레 현장에서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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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베네치아비엔날레가 개막한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이스라엘관 앞. “예술로 학살을 세탁하지 말라”는 구호가 적힌 현수막을 든 시위대 200여명이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공습을 규탄하는 행진을 벌였다. 그동안 경찰은 혹시 모를 충돌에 대비해 입구에서 삼엄한 경비를 펼치고 있었다. 정치·외교 논쟁이 비엔날레의 분위기를 뒤흔든 상징적 장면이었다.

반면 자르디니 공원 안쪽에서는 또 다른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독일관과 프랑스관 앞에는 입장을 기다리는 긴 줄이 늘어섰다. 반면 바로 옆 영국관과 한국관 앞에는 줄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늘 화제를 모으던 미국관도 마찬가지였다.
각국 언론과 미술 관계자를 상대로 여는 사전 공개 행사에서 국가관 앞에 늘어선 줄은 일종의 '인기 투표' 역할을 한다. 이번 국가관 전시에서는 각국의 성패가 어느 때보다 명확하게 갈렸다. 논란의 전시관들과 함께, 현장에서 만난 외신 기자와 큐레이터들의 평가를 종합한 각 국가관의 초반 분위기를 소개한다.
○우크라이나관·러시아관의 팽팽한 신경전
우크라이나관과 러시아관은 개막 전부터 세계 미술계의 관심을 모았다. 우크라이나관은 러시아와의 전쟁 지대에서 대형 조각을 만든 뒤 이를 베네치아로 옮기고, 그 과정을 담은 영상 작품을 선보였다. ‘안보 보장’이 전시 제목이다.
반면 러시아관 내부는 파티 분위기였다. 아르헨티나·말리·멕시코 등에서 온 젊은 음악가들이 디제잉과 퍼포먼스를 펼쳤기 때문이다. 러시아관은 전시 설명을 통해 “변방의 창조적 잠재력을 조명한다”고 했다.
전쟁 분위기를 싹 지우고, 자국에 라틴아메리카·아프리카처럼 ‘서구에 무시당하고 배척당하는 변방’ 이미지를 씌우려는 의도다. 다만 이날 전시관 앞에서 러시아를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면서 이런 의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러시아는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4년 만에 국가관을 다시 신청해 받아들여졌다. 러시아는 8일까지 사전 공개 기간에만 기자·관계자에게 문을 열고, 9일 정식 개막 후엔 폐쇄한 채 외벽에 작품 영상을 투사하는 방식으로 운영할 예정이다.
몇몇 국가의 빈자리도 눈에 띄었다. 이란은 참여 작가 명단까지 발표했지만, 개막을 앞두고 갑자기 전시 참가를 포기했다. 미국·이스라엘의 이란 공습으로 인해 이동 및 작품 운송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작가 가브리엘 골리아스가 이스라엘의 가자 전쟁을 다룬 작품을 선보이려 했지만, 남아공 정부가 이를 막았다. 작가와 정부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남아공은 국가관 참여 자체를 취소했다.
○독일·오스트리아·카타르 등 인기
예술은 경쟁을 위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경쟁은 인간의 본능이기도 하다. 비엔날레 국가관 전시가 실질적인 '미술 국가대항전' 성격을 띠며 많은 관심을 모으는 이유다. 황금사자상 대신 관객 인기 투표로 상을 주는 올해에는 그 관심이 더욱 커졌다.
가장 큰 호평을 받은 국가관 중 하나는 독일관이다. 올해 비엔날레에서 독일은 건물 안팎으로 작품을 선보였다. 베트남 출신 작가 숭 티에우는 독일관 외벽 전체를 옛 동독 베를린의 베트남 노동자 주거단지의 외관으로 덮어씌웠다. 이 건물은 1938년 나치 독일이 의뢰해 지었던 것. 티에우는 나치의 흔적을 베트남 노동자 주거단지로 덮으며 한 시대의 잔해 위에 다음 시대가 들어선다는 사실을 표현했다.
반면 안쪽에는 가구를 활용한 헨리케 나우만의 설치 작품이 자리 잡았다. 나우만은 올해 2월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작가가 끝까지 완성한 마지막 대형 프로젝트라는 점이 작품의 무게를 더했다는 평가다.

가장 긴 줄이 늘어선 건 플로렌티나 홀칭어가 퍼포먼스 전시를 펼친 오스트리아관이다. ‘시월드 베니스’(Sea World Venice)라는 제목의 이 전시에서는 나체의 여성이 물속에 잠수한 채 관객을 지켜보는 퍼포먼스, 호스에서 터져 나오는 더러운 물에 연구원들이 혼비백산하는 퍼포먼스 등 충격적인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이를 통해 작가는 기후 변화로 가라앉고 있으면서도 비엔날레 등 대규모 이벤트로 이를 가속화하는 베네치아의 현실을 풍자했다.


올해 처음으로 자르디니 공원에 자리를 잡은 카타르관도 눈길을 끌었다. 전통 아랍풍 문양이 들어간 천막 형태의 공간에서 태국계 미국 작가 리크리트 티라바니자의 작품을 선보이고 관객들에게 음식을 나눠줬다. 자국 작가 대신 국제적인 스타 작가에게 첫 전시를 맡긴 배경에는 '아트 허브'가 되겠다는 카타르의 야심이 있다.

○영국관·한국관·미국관 “실망”
반면 그동안 현대미술이 자주 다뤄온 주제를 반복했거나 시각적 임팩트가 약한 국가관은 상대적으로 인기가 덜했다. 영국관이 대표적이다. 영국 흑인예술운동가 루바이나 히미드가 흑인 이민자를 주제로 그린 회화들을 내걸었지만, 신선함이 떨어지고 평이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양옆의 프랑스관과 독일관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섰지만, 영국관 앞에는 줄이 거의 없었다. 늘 황금사자상 후보로 거론되던 영국관이 이런 굴욕을 겪은 건 이례적이다.
한국관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번 전시에는 1945년 해방부터 6·25 전쟁 사이 '해방공간'과 지난해 비상계엄 사태 등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을 주제로 한 설치 작품들이 나왔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의 작품 '더 퓨너럴'을 비롯해 기대를 모았던 요소가 많았지만, 외국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기엔 시각적 임팩트가 부족했다는 평가다. 현장에서 만난 한 외신기자는 “한국 근현대사의 맥락을 잘 몰라 작품의 의미가 곧바로 전달되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탄탄한 작가들을 보유하고 있어 늘 구름 관객을 모으던 미국관은 이번에 혹평을 면치 못했다. 올해 작가는 조각가 알마 앨런으로, 미국 주요 미술관 전시 경험이 없다. 도널드 트럼프 정부의 "사회적으로 민감한 이슈를 다루지 말고 미국적 가치를 증진하는 작가를 내보내라"는 가이드라인 덕분에 운 좋게 선정됐다는 게 미술계의 중론이다. 미국 미술 매체 아트뉴스는 “국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수준의 전시”라며 “이런 전시를 할 거였으면 차라리 미국관을 비워두는 게 나았다”고 썼다.
베네치아=성수영, 강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