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대 남성 A씨는 은퇴 후에도 여전히 현업에서 활약하고 있다. 그는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에서 임원으로 일한 경험을 살려 외국계 반도체 기업 고문으로 일하는 중이다. 영업 연계를 돕는 행정·경영·재정 전문가 역할을 맡는다. 한 대형 금융사 본부장 출신인 60대 남성 B씨도 외국계 금융기업 고문으로 발탁됐다. 이들은 모두 '파견근로' 형태로 은퇴 이후에도 커리어를 이어가고 있다. 고숙련 시니어 파견은 '경영 자문' 명목으로 인정받기 쉬운 '고위 임원 출신' 등 극소수에게만 기회가 주어진다. 현행 파견법이 행정·경영·재정 전문가 업무 등 극히 일부의 경우에만 파견근로를 허용하고 있어서다.
인사·노무·재무 등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한 업무라 해도 '실무진 출신 시니어'라면 파견법상 파견근로가 불가능한 상태다. 고숙련 시니어들이 '청소·경비' 등 단순 노무직에만 갇혀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고숙련 시니어 '월 1000만원'…파견근로자 43% '고령'
고령자들이 전문성을 살려 파견근로를 하는 경우 비교적 높은 소득을 얻는 것으로 나타났다. 1일 한경닷컴이 파견·도급 아웃소싱 전문기업 맨파워코리아를 통해 입수한 65세 이상 파견근로자 근무 현황을 분석한 결과 월평균급여가 높은 이들 대다수는 이처럼 전문성을 활용하는 업무에 배치된 것으로 확인됐다. 행정·경영·재정 전문가 업무로 파견된 65세 이상 파견근로자들의 평균 월평균급여는 약 690만~1000만원대로 집계됐다. 컴퓨터 관련 전문가는 520만원으로 파악됐다.
하지만 이는 극히 예외적인 사례다. 맨파워코리아를 통해 파견된 65세 이상 파견근로자 227명 중 143명은 일시·간헐적 사유에 따른 파견근로인 것으로 조사됐다. 업무 내용은 주로 건물 청소 종사자, 음식 조리 종사자, 자동차 운전 종사자, 수위·경비원 등이 대다수였다.
고령화에 따라 일하려는 시니어 인구는 빠르게 늘고 있지만 정작 산업 현장에선 이들의 경력과 전문성을 받아낼 통로가 비좁은 셈이다.
파견근로 시장에서 고령층 비중은 가파르게 증가하는 추세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국가데이터처 경제활동인구 부가조사 결과를 분석한 내용을 보면 60세 이상 파견근로자는 2017년 4만9000명으로 나타났다. 2021년엔 6만9000명, 2023년엔 7만2000명을 기록했고 2024년 8만7000명으로 늘어났다. 지난해엔 9만2000명이 파견된 것으로 나타나 전체 파견근로자(21만3000명) 중 43.2%를 차지했다.
20~50대 파견근로자가 줄어든 빈자리를 60세 이상이 채운 것이다.
고령자 절반 "계속 근무 원해"…대다수는 '단순 노무'
시니어 2명 중 1꼴로 앞으로도 일하기를 원하고 있다는 설문 결과도 나왔다. 국가데이터처에 따르면 65~79세 고령자 중 57.6%는 이 같이 응답한 것으로 조사됐다. 단순히 생계 때문만이 아니었다. 일하려는 이유를 묻자 38.1%가 '일하는 즐거움'을 꼽았다. 하지만 일자리의 질은 기대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실정. 전체 취업자 중 단순 노무 종사자 비중은 13.9%로 나타났는데 65세 이상만 떼어놓고 보면 34.8%로 치솟는다. 반면 전체 취업자 가운데 41.6%를 차지하는 전문가·사무 종사자는 65세 이상으로 구분하자 10.2%로 쪼그라들었다. 고숙련 인력이 은퇴 이후 청소·경비·조리 등의 업무로 밀려나는 '구조적 하향 취업'이 고착화되고 있다는 의미다.
공공 노인 일자리도 대안이 되지 않는다. 노인 일자리 사업 참여자 가운데 70.5%가 월 30만원도 되지 않는 활동비 수준의 급여를 받는다. 노인 일자리 사업 예산은 2004년 212억원에서 지난해 2조1847억원으로 불어났다. 재정을 투입해 단순 활동형 일자리를 늘리는 방식만으론 고숙련 시니어의 소득과 전문성을 뒷받침하는 데 한계가 따른다.

전문성 갖춘 은퇴자도 '경력 무관' 직무 내몰려
인적 자원(HR) 업계에선 고령자에 한해 파견법을 완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기업들은 인력난을 겪으면서도 고령자를 선뜻 직접 고용하지 못한다. 퇴직금이나 산업재해 가능성, 노무관리 등의 부담이 커서다. 시니어들은 자신의 경력을 살릴 수 있는 일자리를 원한다. HR 기업이 고용 관리를 맡는 파견 형태로 일할 수 있다면 기업은 인력난을 해결하고 시니어는 양질의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문제는 현행 파견법이 32개 업무에 한해서만 파견근로를 허용하고 있다는 것. 대기업 엔지니어나 기획실 출신, 인사·노무·재무 실무자였더라도 파견 형태로 다시 일하려면 경력과 무관한 직무로 밀려날 가능성이 크다.
한 60대 여성 C씨는 글로벌 IT·금융 분야에서 인사 실무 업무를 수행하다 퇴직한 이후 '육아휴직 대체자'를 예외로 둔 규정을 이용해 가까스로 외국계 영상 솔루션 기업 인사 담당자에 파견될 수 있었다.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사실상 파견이 불가능한 업무였다.
파견은 직접 고용·정년연장과 달리 청년 채용과 충돌하거나 기업 인건비 부담을 키우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정규직 정원을 차지하지 않는 데다 필요한 직무에만 유연하게 인력을 배치할 수 있어서다. 체력과 생활패턴에 맞춰 주 3일, 하루 4시간 등의 형태로 일하고 싶은 시니어에겐 또 다른 기회일 수 있다.
고령자 대상 파견법 완화 주장…"보호 장치 있어야"
업계 일각에선 무분별한 규제 완화보다 일정 장치를 둔 상태로 개정하는 방안이 거론되고 있다. 청년들이 6개월 이상 지원하지 않는 직무나 신설된 업무에 한해 65세 이상 파견을 허용하는 '일자리 샌드박스' 방식도 언급되는 중이다. 황희승 브레인커머스 대표는 "1998년 외환위기 직후 제정된 파견법의 본래 취지는 기업의 무분별한 간접고용을 막아 청장년층의 정규직 일자리를 보호하는 것이었지만, 정규직 시장 진입 자체가 막혀 있는 65세 이상 은퇴자들에게 파견은 착취 수단이 아닌 경제활동을 이어갈 사실상 유일한 통로"라며 "청년 일자리를 보호하려는 선의의 법안이, 보호 대상이 아닌 고령층에 일률적으로 적용되면서 고숙련 시니어들의 일할 기회마저 원천 봉쇄하는 '의도치 않은 배제'의 역설을 낳고 있다"고 지적했다.
시니어 일자리 창출을 위한 방향 자체는 긍정적이지만 보호 장치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이준희 광운대 법학과 교수는 "(고령층 파견법 완화는) 고령자들에게 취업할 기회를 확대한다는 측면에서 의미 있을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파견 기간과 급여 수준의 최저선 등을 규율하는 보호 장치가 더해져야 고령층 파견법 완화의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대영 한경닷컴 기자 kd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