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 호(1587호) 한경비즈니스 커버 스토리는 ‘2026 파워 금융인 30’입니다. 대한민국 금융계를 이끄는 30인의 리더를 선정했습니다. 이 기획을 준비하면서 자연스럽게 한 사람이 떠올랐습니다. ‘월가의 왕’이라 불리는 JP모간체이스의 CEO 제이미 다이먼입니다.
JP모간은 압도적 세계 1등입니다. 2025년 기준 총자산 6400조원으로 대한민국 국민 전체가 1년 동안 벌어들이는 돈의 두 배가 넘는 규모를 은행 하나가 굴리고 있습니다. 시가총액은 1240조원으로 경쟁자인 뱅크오브아메리카보다 두 배 이상 큽니다. 한 해 순이익만 83조원입니다. 한국 4대 금융지주의 순이익을 모두 합쳐도 JP모간의 4분의 1 수준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이 거대한 제국의 왕좌를 20년 넘게 지키고 있는 사람이 바로 제이미 다이먼입니다.
다이먼의 위상은 숫자를 넘어섭니다. 그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현장에서 정면으로 돌파하고 지금까지 권좌를 지키고 있는 유일한 CEO, 즉 ‘라스트 맨 스탠딩(Last Man Standing)’입니다. 시장이 요동칠 때 백악관과 재무부, 미국 중앙은행(Fed)이 가장 먼저 찾는 전화번호는 그의 것입니다. 2023년 퍼스트리퍼블릭은행 위기 당시 재닛 옐런 재무장관이 그에게 “민간 차원의 구조대를 조직해달라”고 요청한 일화는 유명합니다. 사실상 미국 금융 시스템의 최종 소방수이자 ‘그림자 Fed 의장’이라 불려도 손색없습니다.
다이먼의 스토리가 매력적인 이유는 처절한 실패와 화려한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씨티그룹 제국을 건설하며 ‘월가의 황태자’로 군림했으나 1998년 돌연 스승에게 해고당하는 굴욕을 겪습니다. 야인으로 지내던 그는 그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순자산이 영향을 받은 것이지 내 자아가 영향을 받은 게 아니다.” 이후 그는 시카고의 부실 은행 뱅크원 CEO로 부임하면서 자신의 전 재산 절반인 6000만 달러를 뱅크원 주식에 쏟아부었습니다. “내가 영구적으로 여기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싶었다.” 이를 지켜본 JP모간은 2004년 다이먼이라는 인물을 얻기 위해 뱅크원을 통째로 인수하는 결단을 내립니다. 2005년 그는 마침내 JP모간의 수장으로 복귀하며 자신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다이먼의 경영철학은 단 하나로 요약됩니다. ‘포트리스 밸런스 시트(Fortress Balance Sheet)’, 즉 요새 같은 재무 구조입니다. 그는 20년 넘게 매년 주주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 단어를 빠뜨린 적이 없습니다. “요새 재무제표를 유지한다는 것은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준비다. 무엇이 올지는 모르지만 무언가가 온다는 것은 안다.” 그리고 덧붙입니다. “레버리지는 당신을 죽인다. 공격적인 회계도 당신을 죽인다. 목표는 진짜 마진, 진짜 고객, 보수적인 회계다.”
이 전략의 진가는 모두가 공포에 질려 도망칠 때 드러납니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베어스턴스를 인수하고 최근 퍼스트리퍼블릭의 구원투수로 등판할 수 있었던 동력은 평소 닦아놓은 이 ‘요새’에서 나왔습니다. 단기 성과에 집착하지 않는 것도 이 철학의 일부입니다. 분기 실적 가이던스 제공을 반대하며 기술과 인재, 리스크 관리에 대한 투자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AI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공격적입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실행하는 에이전틱 AI를 금융서비스 전반에 도입하며 JP모간을 가장 오래된 동시에 가장 혁신적인 플랫폼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JP모간은 2005년 이후 19년 연속 기록적인 매출을 달성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매일 전 세계 자본의 동맥을 주무르는 이 왕의 양복 주머니 속에 늘 낡은 종이 한 장이 들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른바 다이먼의 ‘포켓 카드(Pocket Card)’입니다. 여기에는 그가 매일 아침 점검하는 10여 개의 핵심 우선순위와 경영원칙이 빼곡히 적혀 있습니다. 6400조원이라는 거대한 자산에 매몰되지 않고, 오늘 당장 실행해야 할 본질이 무엇인지 잊지 않으려는 리더의 지독한 자기통제입니다.
눈앞의 수익률인가, 흔들리지 않는 요새인가. 이번 호가 선정한 한국의 파워 금융인 30인 또한 항상 이 질문 앞에 서 있을 겁니다. 왕좌를 지탱하는 것은 화려한 왕관이 아니라 주머니 속 종이 한 장에 새긴 요새의 마음임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아, 최근 제이미 다이먼이 인터뷰한 내용 중 재미있는 게 있어서 소개합니다. 그는 금요일에는 중요한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일주일 내내 결정을 내리다 보면 금요일쯤에는 인지적 자원이 고갈된다”는 이유입니다. 주말에 쉬려고 결정도 서두르게 되고요. 그는 또 “분노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감정 절제 역시 리더십의 주요 덕목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안타깝게도 아직도 그런 실수를 하기도 한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도 경영을 하면서 꽤 자주 화를 내나 봅니다. 역시 사람은 어쩔 수가 없긴 한 것 같습니다.
이홍표 한경비즈니스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