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 축구 팬덤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프로축구 K리그 직관을 사랑하는 ‘국내 축구(국축) 팬’과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등 해외 빅클럽에 열광하는 ‘해외 축구(해축) 팬’이다. 종종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던 두 집단이다. 국축 팬들은 “모니터로만 보는 새벽 축구는 현장의 호흡이 와닿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해축 팬들은 “K리그는 경기 수준이나 보는 재미가 덜하다”며 평행선을 달리기 일쑤였다.
하지만 결코 하나 될 수 없을 것 같던 두 팬덤이 한자리에 모여 완벽한 축제를 즐겼다. 지난 19일 수원월드컵경기장(빅버드)에서 열린 'OGFC 대 수원삼성'의 레전드 매치가 그 무대였다.
유튜브 채널 ‘슛포러브(Shoot for Love)’가 기획한 이번 판은 양측 팬들의 가슴속 가장 찬란했던 시절을 정조준했다. OGFC는 2000년대 후반부터 박지성과 함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해축 1세대’의 우상들이 뭉친 팀이다. 이에 맞선 수원은 올해 창단 30주년을 맞아 1990년대 중후반 K리그의 ‘레알 마드리드’로 불리던 시절의 전설들과 최근까지 헌신한 프랜차이즈 스타들을 총동원했다.
이날 빅버드의 관중석은 형형색색의 모자이크 같았다. 푸른 유니폼의 수원 팬들과 붉은 유니폼의 맨유 팬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전광판에 양 팀의 레전드들이 차례로 등장하자 국축과 해축의 경계는 눈 녹듯 사라졌다. 한쪽에서 맨유의 클래식 응원가가 울려 퍼지면, 다른 한쪽에서는 K리그 응원 문화의 자존심인 수원 서포터스 ‘프렌테 트리콜로’가 90분 내내 웅장한 카드섹션과 챈트로 화답했다.
‘폼은 일시적이지만 클래스는 영원하다’는 축구계의 오랜 격언은 이날 빅버드 잔디 위에서 고스란히 증명됐다. 비록 유니폼 핏은 예전 같지 않고 발걸음은 묵직해졌지만, 발끝의 감각만큼은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렸다. 수원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데니스의 자로 잰 듯한 패스를 산토스가 마무리하며 선제골을 터뜨리자 빅버드는 용광로처럼 달아올랐다. 이에 질세라 라이언 긱스(웨일스)의 부드러운 턴과 리오 퍼디난드(잉글랜드)의 나이를 잊은 철벽 수비가 나올 때마다 경기장을 가득 메운 관중은 우레와 같은 기립 박수를 보냈다.

이번 매치가 남긴 가장 큰 수확은 이질적이었던 두 집단이 서로의 문화를 존중하며 화합을 이뤄냈다는 점이다. 경기 후 한 맨유 팬이 “수원의 열정적인 응원을 직접 겪어보니 K리그 직관의 매력을 확실히 이해하게 됐다”고 털어놓은 대목이 이를 방증한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최정상에 섰던 퍼디난드와 네마냐 비디치(세르비아) 등 해외 레전드들조차 수원 팬들이 뿜어낸 열기에 “어메이징(Amazing)”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수원 팬들 역시 뜻깊은 장을 마련해 준 주최 측에 품격 있는 인사로 화답했다.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자 응원석 중앙에는 ‘Thank you shoot for love(고마워요 슛포러브)’라는 대형 배너가 펼쳐졌다. 감독 겸 선수로 그라운드를 누빈 서정원은 “다시 팬들 앞에 설 수 있어 감회가 남다르다”며 “귀중한 자리를 마련해 준 슛포러브에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소회를 전했다.
수원 구단의 세심한 지원도 행사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일조했다. 구단은 김호·차범근 전 감독을 비롯해 이석명 전 단장, 리호승 전 사무국장 등 구단의 기틀을 다진 원로들을 VIP로 초청해 예우를 갖췄다. 나아가 과거 서정원 감독을 보좌했던 코칭스태프와 주무, 피지컬 담당 등 지원 스태프까지 당시 멤버 그대로 벤치에 앉혀 선수단과 올드 팬들의 짙은 향수를 자극했다.

그러나 완벽했던 축제가 남긴 '청구서'의 이면에는 씁쓸한 현실이 자리한다. 관련 업계에 따르면 슛포러브는 이번 매치로 수십억원대 적자를 낸 것으로 전해진다. 막대한 비용이 드는 해외 레전드 섭외를 단행하면서도, 이를 감당할 확실한 기업 메인 스폰서나 용품 후원을 끝내 구하지 못한 채 무대를 강행한 결과다.
스폰서 난항이 부른 위기는 오히려 감동의 반전이 됐다. 스폰서를 구하지 못해 비어버린 OGFC의 유니폼 전면에는 상업 광고 대신 슛포러브와 인연을 맺은 16개 비영리 단체의 이름이 채워졌다. 비록 현실의 벽에 부딪혀 거대한 ‘회계상 적자’를 떠안았지만, 3만8000여명의 축구 팬들에게 평생 잊지 못할 압도적인 ‘낭만 흑자’를 안겨주며 빅버드의 밤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수원=서재원 기자 jwse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