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은 아들을 무릎에 안고 있는 어머니. 하지만 어머니의 눈에는 눈물 자국이 없습니다. 대신 어머니는 하늘을 보고 있습니다. 이 그림의 제목은 ‘레밍케이넨의 어머니’. 핀란드 신화를 소재로 한, 핀란드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입니다.
핀란드의 신화 속 용사인 레밍케이넨은 공주를 구하러 모험을 떠났다가 끔찍하게 살해당하고 말았습니다. 시신은 토막 나 버려졌습니다. 그러자 어머니가 나섰습니다. 어머니는 강바닥에서 아들의 몸을 하나씩 건져 올려 꿰매 붙였습니다. 그래도 숨이 돌아오지 않자 신에게 기도했습니다. 신은 꿀벌을 보냈습니다. 꿀벌이 가져오는 신의 꿀이 닿으면 아들은 되살아날 것입니다. 어머니가 울지 않는 이유는 아들이 곧 살아날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 그림이 완성될 당시 핀란드의 상황이 딱 이랬습니다. 핀란드는 일제강점기 시절의 조선처럼 외세의 오랜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곧 나라를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그림을 그린 화가는 믿었습니다.
그림을 그리기 2년 전, 화가는 네 살 난 딸을 잃었습니다. 딸은 죽음에서 살려낼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림을 통해 나라는 살려낼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핀란드 역사상 가장 중요한 화가, 핀란드의 국기와 지폐를 디자인했던 국민 화가 악셀리 갈렌칼렐라(1865~1931) 이야기.

사라져 가는 나라의 화가
북유럽에 있는 나라 핀란드. 이곳에 사는 핀란드인의 조상은 시베리아에서 스칸디나비아 반도로 이주해 온 사람들입니다. 오랫동안 부족 생활을 하던 이들은 12세기부터 약 600년 동안 스웨덴 왕국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지배층은 스웨덴어를 썼습니다. 학교에서도 신문에서도 모두 스웨덴어를 썼습니다. 핀란드어는 농민과 어부의 언어였습니다. 1809년 스웨덴이 물러간 후에도, 핀란드는 약 100여 년간 러시아 제국의 지배 아래 놓여 있었습니다.그래도 ‘우리는 핀란드인’이라는 정체성은 이어졌습니다. 대대로 내려오는 이야기 ‘칼레발라’ 덕분이었습니다. 칼레발라는 수천 년 동안 노래로 전해져 내려온 서사시, 우리로 치면 전래동화 같은 것입니다. 그런 나라에서 갈렌칼렐라는 1865년 태어났습니다.

중산층 집안 출신인 그는 열네 살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엘리트 화가 코스를 밟았습니다. 19세에는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가서 공부했지요.
하지만 파리의 그림은 그에게 맞지 않았습니다. ‘우리 것을 그려야겠다.’ 갈렌칼렐라는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칼레발라에 있는 이야기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첫 작품 ‘아이노 삼부작’이 호평을 받으면서 그는 주목받는 화가로 떠올랐습니다. 핀란드로 돌아간 그는 20대 중반의 나이에 핀란드를 대표하는 화가로 자리잡았습니다. 결혼해서 예쁜 딸도 봤지요.


하지만 몇 년 뒤, 그가 ‘절규’로 유명한 노르웨이의 화가 에드바르 뭉크와 함께 전시를 하기 위해 독일로 떠났을 때 비극이 벌어졌습니다. 핀란드에 남아있던 딸이 만 네 살의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충격에 빠진 갈렌칼렐라는 ‘죽음의 꽃’이라는 목판화를 새겼습니다. 검은 연못가에 피어 있는 창백한 꽃 한 송이를 그린 그림. 그 아래 붙인 시는 이랬습니다. “검은 연못 가장자리에 아름답고 창백한 꽃이 피었네. 꿈속에서 나는 그 꽃을 꺾었네. 그러나 그 꿈에서 나는 깨어나지 못하리.” 훗날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가슴에 눈물을 머금은 채 그 이미지를 새기고 있을 때, 그 말들은 스스로 태어났다.” 자식을 잃은 고통으로 그의 그림은 거칠고 어두워졌습니다.


하지만 시간은 흘렀습니다. 남아 있는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계속 슬픔에만 잠겨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아냈습니다. 그건 그림으로 하는 독립운동이었습니다.
1898년 러시아가 보낸 새로운 총독이 핀란드에 부임했습니다. 그는 러시아화(化) 정책을 밀어붙였습니다. 핀란드 의회의 권한을 줄이고, 언어를 러시아식으로 바꾸려 했습니다. 일제강점기의 국어 말살 정책과 같은 것입니다. 핀란드인들은 분노했지만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습니다.
갈렌칼렐라는 민족의 혼을 일깨우기 위해 더 전투적으로 칼레발라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1896~1899년 사이에 훗날 그의 대표작으로 남을 네 점이 연달아 나왔습니다. 그중 하나가 맨 앞에서 본 ‘레밍케이넨의 어머니’입니다.
그림으로 나라를 구하다
갈렌칼렐라의 그림은 핀란드인들의 일상에 스며들었습니다. 특히 큰 힘을 발휘한 것은 1896년 작품 ‘삼포의 방어’입니다.
삼포는 칼레발라 신화 속의 마법 맷돌입니다. 이걸 돌리면 곡식과 소금과 금이 끝없이 쏟아져 나옵니다. 핀란드인들에게 행운과 번영을 주는 신성한 보물이지요. 그런데 북쪽 어둠의 땅을 다스리는 마녀가 삼포를 빼앗아 갑니다. 영웅은 동료들과 함께 마녀의 성에서 삼포를 되찾아 배를 타고 도망칩니다. 거대한 새로 변신해 뒤쫓는 마녀와 배 위에서 한 판 결투가 벌어집니다. 갈렌칼렐라는 이 장면을 그렸습니다. 핀란드인들은 이 그림 앞에서 알아봤습니다. “삼포는 우리의 혼이다. 마녀는 러시아다. 우리 것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한다.” 이 그림은 핀란드인이 자신들의 신화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이미지가 되었습니다.
1900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서 갈렌칼렐라는 대담한 행동에 나섭니다. 당시 이 행사는 50개국이 참가하고 5000만 명이 방문한, 세계에서 가장 큰 무대였습니다. 여기서 갈렌칼렐라는 핀란드관의 천장 그림 네 점을 맡았습니다. 그 중 ‘독사밭을 가는 일마리넨’에 그는 장치 하나를 숨겨두었습니다. 그림 속 대장장이가 쟁기로 가는 독사 밭. 그 독사 떼 가운데 한 마리가 작은 왕관을 쓰고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면 러시아를 상징하는 러시아 로마노프 왕가의 왕관이었습니다. 세계인이 주목하는 한복판에서 러시아 황제를 독사로 그려놓은 것입니다.


러시아는 공식적으로 항의하지 못했습니다. 독사 왕관은 그림의 아주 작은 부분이었고, 멀리서 보면 알아차리기 어려웠으니까요. 하지만 핀란드인들은 그 모습을 알아봤습니다. 세계 미술계는 깜짝 놀랐습니다. ‘이렇게 배짱 두둑하고 실력 있는 화가가 있다니.’ 갈렌칼렐라는 이 그림으로 금메달을 받았습니다. 뒤이어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고, 독일·오스트리아 등지에서 해외 예술가들과 협업 전시를 열기도 했습니다. 핀란드라는 이름이 글로벌 미술계의 한복판에 놓이기 시작한 겁니다.
같은 시기 작곡가 장 시벨리우스도 음악으로 같은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핀란드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교향시 '핀란디아'를 작곡한 것입니다. 러시아가 이 곡의 공연을 금지하자 시벨리우스는 제목을 '조국', '스칸디나비아 행진곡' 등으로 바꿔가며 연주했습니다. 두 사람의 작업은 핀란드인의 정체성을 단단하게 만들었습니다. '핀란디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비공식 국가(國歌)처럼 불렸고, 갈렌칼렐라의 칼레발라 그림들은 학교 교과서에 실렸습니다. 러시아가 언어와 제도를 빼앗아도 그림과 음악 속의 '핀란드'는 빼앗을 수 없었습니다.

1907년 갈렌칼렐라는 자기 이름을 바꿨습니다. 이때까지 그의 공식 이름은 스웨덴어 이름 ‘악셀 갈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때부터 그는 핀란드어 이름 ‘악셀리 갈렌칼렐라’를 쓰기 시작합니다. 당시 핀란드 지식인들 사이에 이름을 핀란드어로 바꾸는 운동이 번지고 있었거든요. 최고의 국민 화가가 앞장서면서 개명 운동은 더욱 힘을 얻었습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의 혼란을 틈타 핀란드가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이듬해 핀란드가 좌우로 갈라져 내전을 벌일 때 52세가 된 갈렌칼렐라는 아들 요르마와 함께 전쟁에 나가 2주간 총을 들고 싸웠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훗날 핀란드의 초대 대통령이 된 만네르헤임 장군이 그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제는 총 대신 붓을 드시오.” 신생 공화국의 국기와 군복, 훈장, 지폐 디자인이 그에게 맡겨졌습니다. 그가 디자인한 백장미 훈장은 지금도 핀란드 대통령이 외국 정상에게 수여하는 최고 훈장입니다. 핀란드라는 나라의 얼굴을 그가 그린 셈입니다.

미완의 책, 완성된 나라
갈렌칼렐라는 계속 그림을 그렸습니다. 말년의 그는 《위대한 칼레발라》라는 작품에 매달렸습니다. 칼레발라 이야기를 기록한 책 전체에 삽화를 넣은 700페이지짜리 완전판입니다. 1925년부터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이 책은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을 평생의 역작이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작업을 끝내지 못했습니다. 1931년 3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강연을 마친 갈렌칼렐라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폐렴으로 쓰러졌습니다. 향년 66세. 국장급 장례가 치러졌고, 장례 행렬에는 헬싱키 시민 수천 명이 따랐습니다.
그가 처음 붓을 들었을 때 핀란드는 지도에 없는 나라였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 핀란드는 자신만의 국기와 훈장과 지폐를 가진 독립국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국기와 훈장과 지폐를 그가 직접 그렸습니다. 핀란드라는 나라가 하나의 그림이라면, 그 그림에는 그의 붓질 자국이 진하게 녹아 있는 것입니다.<i>**이번 기사는 Akseli Gallen-Kallela(Janne Gallen-Kallela-Siren 지음), Akseli Gallen-Kallela(Ateneum Art Museum·Musee d'Orsay 공동 전시 카탈로그), The Golden Age: Finnish Art 1850~1907(Markku Valkonen 지음), Kansallisbiografia: Gallen-Kallela, Akseli(Aimo Reitala 지음)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i>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문화재 담당 기자가 미술사의 거장들과 고고학, 역사 등을 심도 있게 조명하는 국내 문화 분야 구독자 1위 연재물입니다. 매주 토요일 새로운 이야기로 찾아옵니다. 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미술 소식과 지금 열리는 전시에 대한 심층 분석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 구독 중인 8만명 독자와 함께 아름다운 작품과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