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주가연계증권(ELS) 사태는 국내 금융시장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은행 예금보다 높은 이자율을 안정적으로 얻을 수 있다는 창구 직원의 권유를 믿고 투자에 나섰던 이들 상당수가 원금을 잃었다. 피해자 다수는 은퇴했거나 은퇴를 앞둔 고령층이었다.대규모 불완전판매 논란은 처음도 아니었다. 2019년 파생결합펀드(DLF) 사태 때도 수천억원대 손실이 발생했다. 반복되는 사고는 직원들의 단순한 일탈을 넘어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고 의심하게 만든다.
신간 <설계된 판>(Fixed)의 저자인 존 Y. 캠벨과 타룬 라마도라이는 한국의 DLF·ELS 사태를 개인금융 시스템의 문제를 정면으로 드러낸 사례로 본다. 캠벨과 라마도라이는 각각 하버드대 경제학과 석좌교수, 런던정경대학(LSE) 및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 금융경제학 교수로 일하고 있다.이들은 신간에서 평범한 개인의 입장에서 금융 시스템은 기울어진 운동장에 가깝다고 지적한다. 금융 종사자에 비해 정보와 이해도가 부족한 데다, 어렵게 익힌 지식조차 빠르게 등장하는 신상품 앞에서는 금세 낡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수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금융회사에 이용당하기도 쉽다.
저자들은 현재의 금융 시스템이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분석한다. 제목 그대로 ‘짜여진 판(fixed)’이라는 것이다. 자산이 많은 사람일수록 더 높은 수익률을 얻고, 더 낮은 비용으로 자금을 조달하며, 저축 여력도 크다.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제한된 선택지 속에서 더 비싼 금융상품을 이용할 가능성이 높다. 금융 의사결정 과정도 복잡하다. 조언을 해주는 이들이 고객의 이익이 아니라 자신의 수수료와 실적을 우선하는 금융회사 직원일 가능성도 적지 않다.
저자들은 특히 금융회사들이 상품 가격을 비용 이상으로 높게 책정하고도 시장에서 퇴출되지 않는 ‘시장 권력’을 갖고 있다는 점을 문제로 짚는다. 보수 체계 역시 이해상충을 낳는다. 예컨대 주식 중개인들은 액티브 펀드를 판매할 때마다 높은 수수료를 받기 때문에 성과가 기대에 못 미치더라도 이를 권유할 유인이 생긴다. 최근 국내 코스닥 시장에서 일부 액티브 상장지수펀드(ETF)가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의 보고서 한 장도 없는 삼천당제약을 집중 매수한 사례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번들링’ 역시 경계해야 할 요소로 제시된다. 여러 금융상품을 묶어 구조를 복잡하게 만들면 소비자는 비용과 편익을 제대로 비교하기 어려워진다. 저자들은 한국의 전세제도도 사례로 든다. 전세는 ‘임대료를 내는 것’과 ‘무담보로 돈을 빌려주는 것’이 결합된 구조지만, 이러한 성격이 널리 인식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1000채가 넘는 빌라를 보유한 임대인이 사망하며 문제가 불거진 이른바 ‘빌라왕 사태’를 계기로 위험이 드러났다.
책은 개인이 실수를 줄이기 위한 방법도 제시한다. 소득이 일정하지 않을수록 단기 저축과 대출을 활용해 현금 흐름의 변동성을 관리할 필요가 있다는 조언이다. 교육비나 주거비처럼 큰 지출에 대비하는 방식, 위험 관리에 어느 정도를 지출해야 하는지도 함께 다룬다. 특히 보험에 대해서는 작은 위험이 아니라 큰 위험에 대비하는 수단으로 한정해야 하며, 자기부담금이 높은 대신 보험료가 낮은 상품이 장기적으로 유리하다고 설명한다. 과도한 보장은 비용을 키울 뿐이라는 지적이다.
핀테크에 대한 시각도 균형을 유지한다. 금융 접근성을 높인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이용자의 행동 편향을 활용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짚는다. 많은 이용자가 검색 결과 상단에 노출된 몇 개의 상품만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기업들이 잘 알고 있으며, 이를 영업 전략에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불공정한 금융 시스템을 고치기(fix) 위한 해법도 제시한다. ‘넛지’(nudge, 찔러주기)가 아닌 ‘쇼브’(shove, 세게 밀치기)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소비자가 정책 당국의 예상보다 훨씬 취약한 만큼, 부드러운 유도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강제화와 동시에 상품 구조를 단순화하고, 비용을 낮추며, 위험을 명확히 드러내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드는 데 주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기본 금융상품의 구조 개선, 수수료 규제, 자동화된 저축과 투자 시스템 등 제도적 개입 등이 해법으로 제시된다.
최한종 기자 onebel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