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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준의 시선] 만화(漫?)에 가려진 지옥도(地獄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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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 게바라를 존경하는(혹은 마블 히어로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주로 4050(일부 60까지 포함) 세대에 몰려 있다. 1959년 쿠바 혁명에 성공한 게바라는, 1965년 아프리카 콩고에서의 실패를 겪고도 또다시 혁명을 하기 위해 볼리비아로 떠났다. 안데스산맥 밀림 속에서 게릴라 부대를 이끌던 그가 볼리비아 군과 미국 CIA의 공조 작전에 체포돼 이튿날 작은 학교 건물 안에서 총살당한 게 1967년 10월 9일이다. 후송 대신 조속한 총살을 결정한 것은 CIA가 아니라 볼리비아 바리엔테스 정권의 군부였다. 그들에게 게바라는 살려두면 뒷감당이 안 되는 유명인사였다. 그의 시신은 10일, 볼리비아 군병원 세탁실에서 하루 동안 전시된 다음 극비(極?)리에 암매장됐다. 미국이 오사마 빈 라덴의 시신을 망망대해 속으로 가라앉힌 이유와 같다. 묘지가 상징이 되는 게 두려워서였다.

    한데 그들은 게바라를 수감하거나 무덤을 만들어주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고 만다. 한 사진작가가 게바라 시신의 사진을 찍도록 놔둔 것이다. 눈 뜬 채 죽어있는 그의 모습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를 연상시켰다. ‘체 게바라’라는 ‘밈(meme)’의 탄생, 혁명의 낭만적 반골 포토제닉. 그것은 심지어 자본주의의 상징인 코카콜라의 광고 이미지로 사용되는 모순까지 낳았다. 물론 여기에는 쿠바 공산당이 정치도구로서 게바라를 신격화한 탓도 있다. 우연과 전략이 겹쳐 신화가 탄생한 것이다. 프랑스 사상가 기 드보르는 저서 <스펙터클(spectacle)의 사회>에서, 현대는 리얼리티(사회적 관계 등)보다는 이미지의 매개에 지배되기에, 게바라의 초상(肖像)은 본질과 무관한 ‘스펙터클(볼거리)’로 기능한다고 갈파했다. 진실이 ‘분위기와 시각적 자극’으로 환원돼 굴러가는 세상을 비판한 것이다. 혁명은 사라지고, 혁명의 이미지가 소비된다. 이러한 분석은 별 반박 없이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최소한’ 두 가지를 더 숙고해야 한다. 첫째, 게바라의 실체다. 그는 ‘정치적인’ 피델 카스트로와는 달랐다. 그는 동료들도 서슴없이 ‘직접’ 즉결 처형했다. 쿠바혁명 성공 뒤로는 전쟁포로 수용 감옥을 맡아 사형수들을 즉시 ‘직접’ 총살했다. 그가 사람 죽이는 데는 무정한 기계 같았다고 동료들은 증언한다. 그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휴머니스트’가 아니었다.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게 철칙이자 생태인 ‘찐’ 공산주의자였다. 그는 전 세계 공산화를 위해 핵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고 구소련에 요구했고, 제3차 세계대전까지 일으키려 했다. 볼셰비키의 세계 혁명주의자 트로츠키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게바라는 마오쩌둥과 죽이 잘 맞았고, 김일성이랑도 친해서 북한을 방문해 소녀들과 덩실덩실 춤을 춘 사진이 남아 있다. 그가 죽지 않았다면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이나 폴포트 크메르루즈의 킬링필드 같은 실험에 빠지지 않았으리란 보장이 없다.

    기실 이런 가정도 필요 없다. 현재 쿠바의 실상을 보라. 개인이건 세력이건 간에 그와 그들이 한 일의 동기에 속지 말고 결과를 봐야 한다. 말 못 하는 나무의 마음을 논하지 마라.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안다.


    둘째, 기 드보르의 이론처럼 이미지화된 상업적 타락에서만 그쳤다면 그나마 나을 텐데, 게바라의 경우 여기서 ‘가치 전도(價値 顚倒)’가 한 번 더 발생한다. 코카콜라를 사 마시고 끝나는 게 아니라, 그 혁명이라는 거짓말(휴머니즘)을 더는 검증하지 못하게 하는 장벽이 된다. ‘패션 좌파 감성’에 젖어 지옥도(地獄圖)를 몰라보게 만든다. 당신이 감각하는, 만화 속 주인공 같은 게바라의 낭만성은 사실이 아니다. 그 만화책 안은 증오와 죽음으로 가득 차 있다. 때로 ‘존경’은 혐오보다 위험한 전염병이다. 게바라를 떠받드는 게 김일성한테 그러는 것보다 더 악성이다. 더 대중친화적이고, 더 낭만적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 우리는 이런 것들에 겹겹이 포섭돼 있다. 오스카 와일드는 말했다. “인간이 무언가를 위해 죽는다고 해서 그게 반드시 진실인 것은 아니다”라고. 한국 사회에는 ‘짝퉁 체 게바라’가 너무 많다. 진짜의 가짜도 아니다. 가짜의 가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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