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같은 이 이야기는 명품업체 구찌에서 실제 일어난 일이다. 승계 실패는 기업 규모와 명성을 가리지 않는다. 준비되지 않은 승계가 기업에 치명적인 이유다.
가족기업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세계 경제에서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한다.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약 70%, 일자리의 60%가 가족기업에서 나온다. 수많은 직원과 소비자, 투자자에게 직접적 영향을 미친다.
이 같은 가족기업이 10년 내 대거 세대교체를 맞는다. 후계 구도가 정리되지 않거나 상속 준비가 미흡한 기업도 적지 않아 승계 리스크가 세계 경제에 부담을 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 세계 경제 굴리는 가족기업
최근 맥킨지 분석에 따르면 세계 기업 중 약 3분의 2는 가족기업이고 GDP에서도 비슷한 비중을 차지한다. 세계 상위 500대 가족기업의 연간 매출은 2024년 기준 8조8000억달러로 추정된다. 미국과 중국에 이어 세계 3위 경제권을 형성할 수 있는 규모다. 가족이 최소 20% 지분이나 의결권을 보유하고 세대 승계를 경험한 기업은 세계 대형 상장사의 25%가량을 차지한다. 미국에서는 16개 중 1개, 유럽에서는 7개 중 1개, 아시아에서는 3개 중 1개다. 한국에서 이 비중은 73%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가족기업의 대표적인 약점은 능력주의 훼손이다. 워런 버핏은 아들이나 형제를 최고경영자(CEO) 및 회장 자리에 앉히는 관행을 두고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의 장남이라는 이유로 국가대표 선수가 되는 것과 같다”고 비판했다.그럼에도 많은 기업이 가족기업 체제를 유지하려는 이유는 그만한 강점이 있다고 봐서다. 가장 큰 강점은 관계 구축 능력이다. 시장에서 쌓은 인맥과 신뢰가 세대를 넘어 이어질 수 있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특히 소비자와 공급자의 신뢰가 중요한 유통·소비재 산업에서 가족기업 강점이 두드러진다”며 “이들 산업의 3분의 1 이상이 가족기업”이라고 말했다.
경영 스타일에도 특징이 있다. 가족기업은 분기 실적이 아니라 수십 년을 내다보고 판단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는 보수적인 경영으로 이어진다. 연구개발보다 실물자산 투자에 더 집중하는 경우가 많다. 빠르게 변하는 산업에서는 약점이 될 수 있지만, 전통과 브랜드가 중요한 명품 업종에서는 강점으로 작용한다. 부채비율이 낮고 현금을 많이 보유하는 만큼 위기 상황에서 회복력이 더 강하다는 분석도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글로벌 금융위기와 코로나19 초기에는 가족기업이 비가족기업과 비슷한 충격을 받았지만, 이후에 더 빠르게 회복한 사례가 많았다”고 분석했다.
◇ ‘승계 리스크’ 현실화
문제는 가족기업의 세대교체가 한꺼번에 이뤄질 수 있다는 점이다. 이코노미스트는 최근호에서 세계 가족기업이 동시다발적인 세대교체 국면에 진입했다고 짚었다. 서구에서는 베이비붐 세대가 은퇴 연령에 도달했고, 개혁개방을 통해 1980년대 창업붐이 일었던 중국 민간기업도 본격적인 승계 시점에 들어섰다. 딜로이트가 가족기업 경영진 3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8%는 향후 10년 내 CEO가 교체될 것으로 예상했다. 이 가운데 42%는 그 시점을 3~5년 내로 봤다.상당수 가족기업은 승계 준비를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딜로이트 설문에 따르면 응답자의 85%는 ‘전략적인 CEO 승계 계획이 장기적 성공에 필수적’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실제로 승계 계획을 수립한 기업은 57%에 그쳤고, 이를 적극적으로 실행 중인 곳은 23%에 불과했다.
다음에 회사를 이끌 가족 구성원이 정해지지 않은 곳도 많았다. 조사 대상 기업의 61%는 ‘CEO 역할에 관심 있는 가족 구성원이 최소 1명 이상 있다’고 답했지만 ‘가까운 시일 내 실제로 그 역할을 수행할 준비가 돼 있다’고 본 비율은 23%였다. 기업 규모가 클수록 가족 승계 선호도는 더 낮아졌다. 매출 10억달러 이상 기업 가운데 다음 CEO를 가족에서 찾겠다는 비율은 32%에 불과했다. 매출 5억달러 미만 기업에서는 가족 CEO 선호 비율이 47%, 전문경영인 선호 비율이 46%로 비슷하게 나타났다.
황용식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시장에서는 승계 자체보다 ‘불확실한 승계’를 더 위험하게 본다”며 “제도화된 승계 구조가 없는 기업은 투자자에게 외면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이혜인 기자 he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