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미식에 진심인 이들과 함께 스페인 바스크로 향했다. 다른 목적은 없었다. 오로지 ‘맛’ 하나만을 좇는 여정이었다. 각자 위시 리스트를 내놨지만, 공통분모는 단 하나로 귀결됐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바스크 미식의 성지이자 전설, 아사도르 에체바리(Asador Etxebarri).
그런데 최근 에체바리 방문객 사이에서 필수 코스처럼 거론되는 곳이 하나 더 생겼다. 에체바리의 수장 비토르 아르긴소니스의 제자, 마에다 데쓰로 셰프가 오픈한 ‘치스파(Txispa)’다. 에체바리에서 걸어서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이곳은 오픈 직후 미쉐린 1스타를 거머쥐며 미식계를 놀라게 했다. 제자가 스승의 텃밭 바로 옆에 둥지를 틀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스노보드 선수에서 미쉐린 셰프로
치스파의 오너 셰프 마에다의 이력은 한 편의 영화 같다. 일본 가나자와 출신인 그는 젊은 시절 스노보드 선수, 산장 직원, 에어로빅 강사 등 요리와는 거리가 먼 길을 걸었다. 뒤늦게 요리로 전향한 그는 2011년 전 재산을 털어 스페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그의 목표는 단 하나, 에체바리였다. 스페인어를 배우며 1년을 기다린 끝에 입사한 그는 10년 동안 불과 숯, 연기를 다루는 법을 익혔다. 비토르의 ‘오른팔’로 불릴 만큼 신뢰를 쌓은 그는 2023년 봄 악스페 계곡의 18세기 농가를 직접 리노베이션해 치스파를 열었다. 오픈 7개월 만에 미쉐린 스타 획득과 ‘World’s 50 Best’ 리스트 85위 진입. 세계 미식가들의 레이더에 치스파가 포착된 순간이었다.


치스파를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위치와 공간이다. 레스토랑에 들어서는 순간 마주하는 풍경은 경이롭다. 뉴질랜드 또는 알프스를 연상케 하는 바스크의 웅장한 산맥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18세기 카세리오(Caserio, 산 위의 집)를 개조한 인테리어는 과거의 웅장함과 현대적인 개방감이 공존한다.
화구 앞에서 마주한 치스파의 심장
안내를 받아 다이닝 홀로 이동하기 전, 치스파는 손님들을 주방으로 초대한다. 주방 투어는 이 레스토랑의 정체성을 시각적으로 확인하는 시간이다. 거대한 화구를 열자 압도적인 열기와 화염이 뿜어져 나왔다. 셰프는 그 열기 속에서 직접 수확했다는 땅콩을 건넸다. 평범한 땅콩과는 차원이 다른 부드러움과 고소함이 혀끝을 자극했다.
뒤이어 나온 ‘다코야키’는 치스파의 ‘재패니즈 터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흐물흐물한 오리지널의 질감을 유지하면서도, 풍미는 훨씬 진하다. 바스크식 가쓰오 스시(Euskal Sushi) 또한 인상적이었다. 지역 재료를 중시하는 바스크 정신을 담아 가쓰오의 풍미를 살리되, 농사가 불가능한 지역 특성상 쌀만 수입산을 사용한다는 셰프의 솔직한 설명이 곁들여졌다.
홀에 착석한 후 펼쳐지는 코스는 정교한 파인다이닝의 정수를 보여준다. 첫 번째 디시는 토마토, 새우 누카즈케, 가지, 나스타티움(식용 꽃), 장어 가바야키 등 6가지 재료가 한 접시에 담겨 나온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장어 요리였다. 장어와 사과만 이용해 만든 소스는 데리야키의 감칠맛을 완벽하게 재현해냈다.

물론 스승의 그림자가 짙게 배어 있는 메뉴도 있다. 훈연향을 입힌 캐비아가 그렇다. 에체바리의 시그니처를 계승하면서도, 치스파는 여기에 병아리콩 두부 소스를 더해 차별화를 꾀했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섬세한 캐비아의 향이 두부 소스에 다소 가려지는 듯했다. 스승의 오리지널리티가 워낙 강력한 탓일 게다.

반면 굴 요리는 마에다 셰프의 철학인 ‘프리미티브(primitive·원초적)’를 완벽하게 구현했다. 인류가 가장 오래 먹어온 빵과 우유를 소스의 테마로 삼아, 발효된 사워도우와 염소 치즈의 풍미를 굴에 입혔다. 복합적인 감칠맛과 산미의 밸런스는 치스파의 고점이 에체바리를 위협할 수도 있겠다는 느낌을 줬다.
식사는 해산물을 넘어 육류로 이어진다. 쌀 누룩으로 마리네이드해 장작 화덕에서 천천히 익힌 우설은 지금까지 경험한 것 중 최고의 식감을 선사했다. 쫄깃하면서도 탄력 있는 우설에 그린 페퍼 미소 소스를 곁들여 입체적인 맛을 완성했다.
스승과 제자 사이 긴장감

코스의 대미는 에체바리와 궤를 같이하는 ‘촐레타(Choleta, 스테이크)’가 장식한다. 셰프가 직접 고기를 손질하는 퍼포먼스를 보여준 뒤 테이블에 오른 촐레타는 180일간 드라이에이징된 갈리시안 비프였다. 지방에서는 진한 블루치즈의 풍미가 뿜어져 나왔다. 두께감이 다소 얇아 씹는 재미는 덜했지만, 숙성에서 오는 깊은 육향만큼은 스승의 그것에 필적했다.
디저트 역시 치스파만의 색깔이 뚜렷하다. 그릴에 구워 달고나 같은 점성을 지닌 무화과 요리, 호박 미소로 감칠맛을 더한 호박 아이스크림이 이어진다. 마지막을 장식한 ‘사쿠라 플랑’은 레스토랑 뒤편의 벚꽃을 소금에 절여 1년 동안 보관한 뒤 사용한다고 했다. 은은한 꽃향기가 감도는 플랑은 바스크의 산맥과 일본의 정서를 하나로 묶으며 긴 식사를 품격 있게 마무리하도록 돕는다.
치스파와 에체바리 사이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비토르는 제자의 선택을 “윤리적으로 편치 않다”고 말했고, 마에다 셰프는 “그저 가족이 사는 마을에서 식당을 열고 싶었을 뿐”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두 곳을 모두 경험한 이라면 알게 된다. 치스파는 더 이상 스승의 아류가 아니다. 에체바리가 불과 재료의 정직한 대화라면, 치스파는 그 대화에 섬세한 수사를 더해 한 편의 시를 써 내려가는 파인다이닝이다.
바스크 미식의 정수를 경험하고 싶다면, 그리고 전설의 뒤를 잇는 거대한 잠재력을 목격하고 싶다면 악스페 계곡으로 향하라. 그곳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의 가장 아름답고도 어려운 거리를 맛보게 될 것이다.
글·사진=이영민 미식 칼럼니스트&사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