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식어가는 영국의 손에서 세계 지도자의 횃불을 빨리 받아내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의 결론이다. 2차 대전 전 세계의 중심엔 영국이 있었다. 그러나 1, 2차 대전을 거치면서 탈진한 영국은 쇠락했다. 동유럽뿐만 아니라 그리스, 튀르키예까지 침투하는 소련 공산주의에 맞서 유럽 어떤 국가도 방패를 들 힘이 없었다.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자주권을 지닌 국가들이 강압당하고 전복될 수 있는 세계는 아주 빠른 속도로 험악한 곳이 되고 말 것”이라며 두 나라에 대한 원조를 의회에 요청했다(할 브랜즈 ‘유라시아 지정학’). 미국의 고립주의를 포기한 ‘트루먼 독트린’은 이렇게 탄생했다.
미국은 ‘마셜 플랜’으로 알려진 ‘유럽 부흥 계획’으로 이어갔다. 1948년 기준 유럽과 아시아에 제공한 미국의 원조 규모는 국내총생산(GDP)의 5%에 달했다. 베를린 봉쇄 등 소련의 잇단 강압에 위기를 느낀 유럽 국가들은 방위 동맹을 결성했으나 소련에 맞설 무력은 ‘새발의 피’에도 못 미쳤다. 미국의 참여를 간청해 1949년 창설된 것이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다. 나토는 냉전 시대 유럽의 든든한 방패였다. 냉전 해체 이후에도 코소보 전쟁 때 미국과 유럽연합(EU)이 공동 대응에 나서는 등 대서양 동맹은 끈끈하게 이어졌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트럼프가 집권 이후 “썩어가는 대륙” 등 유럽을 자극적으로 비판한 사례는 한둘이 아니다. 이란전을 계기로 트럼프와 유럽 사이는 더욱 멀어지고 있다. 트럼프는 유럽의 이란전 지원 거부를 이유로 나토 탈퇴까지 거론하면서 ‘77년 대서양 동맹의 황혼이혼 위기’라는 말도 나온다.
트럼프가 유럽을 불신하는 배경엔 무엇보다 ‘경제·안보 무임승차론’을 들 수 있다. 트럼프는 나토를 구식 방위체제라고 비판하고, 집단 방위를 규정한 규약 제5조에 대해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독일 주둔 미군 감축을 공식화했으며 유럽 국가들에 방위비 증액을 압박했다. ‘안보 자강’에 소홀한 유럽의 책임이 크다. 히틀러의 침공을 받은 유럽 국가들은 재건에 급급해 안보는 미국에 의존했다. 소련의 위협이 고조된 때 자체 국방 증강에 나섰으나 냉전이 끝나자 방위비를 대폭 축소했다. 나토 유럽 회원국들의 GDP 대비 방위비는 냉전기 3~6%에서 2000년대 1.2~1.5%까지 뚝 떨어졌다. 안보 비용을 줄이는 대신 복지·교육 부문 지출을 늘렸다. 군비 삭감분을 경제, 사회복지 분야에 투입하는 이른바 ‘평화배당금’ 혜택을 톡톡히 누린 것이다.
미국 돈으로 지켜주는데 러 에너지 수입 ‘배신’
유럽 주요 국가들이 이렇게 수십 년 동안 미국에 안보를 공짜로 기댄 덕에 경제 번영과 복지를 누렸다는 것이 트럼프의 지론이다. 트럼프는 “EU는 미국을 착취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며 “미국 납세자가 유럽 안보를 부담한다”고 비판했다. 대미 불공정 무역장벽이 높다는 불만도 크다. 노르트스트림 가스라인을 통해 독일이 러시아에 에너지를 의존하고 있다는 공격도 거세다. 미국 돈으로 러시아로부터 독일을 지켜주는데 정작 배신 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유럽에 방위비 증액과 관세 청구서를 내미는 것은 당연하다는 인식이다.
유럽의 방위비 축소는 스스로 방위산업을 무너뜨렸다는 지적도 받고 있다. 냉전이 끝나자 전차, 전투기, 대포 등 주요 무기 생산라인을 폐쇄하거나 줄였다. 유럽은 전략폭격기, 위성 기반 감시 능력, 미사일 등 고가의 첨단 무기들을 대부분 미국에 의존하는 실정이다. C4ISR(지휘, 통제, 통신, 컴퓨터, 정보, 감시 및 정찰) 작전 체계도 미국 기술 없이는 운용이 불가능하다. 유럽 핵심 무기 60%가량이 미국산이란 추정치도 있다. 이 때문에 유럽 단독으로 대규모 전쟁을 지속하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다.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뒤 바닥 난 무기 재고, 탄약 부족이 드러나자 생산 라인을 복구하고 있다. 한국이 폴란드에 전차, 자주포 등을 대량 수출할 수 있는 배경이다.
트럼프가 GDP 대비 방위비 비율을 5%로 올릴 것을 요구하자 EU는 재무장에 나서고 있다. 2030년까지 최대 8000억 유로를 방위비로 지출하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GDP 대비 직접 군사비 3.5%로 상향, 간접 안보 투자비 1.5% 투입 등 방안도 발표했다. 영국, 프랑스를 중심으로 미국 없는 안보 협의체 구축에도 나서고 있다.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는 “미국 없이 방어할 각오를 해야 한다”고 했다. 미국 핵우산을 대체하는 ‘유럽 공동 핵 억지력 확보’도 공론화하고 있다. 프랑스, 영국의 핵 자산을 통합 운용하고 독일이 핵공유 형태로 참여하는 공유 모델도 거론된다(송승종 ‘유럽의 핵공유 및 핵억제력’).
트럼프의 유럽에 대한 불만은 ‘경제·안보 무임승차’만이 아니다. 유럽의 이민 개방, 다문화주의, 과도한 복지 등 이념적, 정치적 올바름(PC)에 대한 반감도 작용한다.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이민자들을 수용하는 것이 유럽의 정체성을 깨트리는 일이라고 비판한다. 미국 빅테크 기업들에 대한 막대한 과징금 등 유럽의 규제도 불만이다.
유럽, 탈냉전 후 방위비 축소로 방산 무너져

미국의 압박에 유럽이 안보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자립은 쉽지 않을 것이란 분석이 많다. 방위비 대폭 증액은 복지 등 다른 분야 예산 삭감을 불러올 가능성이 크다. 복지 지출이 상당한 유럽 국민이 이를 순순히 받아들일지 의문이다. 당장 러시아의 위협 인식이 낮은 스페인은 공개적으로 반대하고 재정 상황이 좋지 않은 남유럽 국가들도 부담스러워하고 있다. 독자 핵무장과 관련해선 프랑스, 영국의 핵무력이 러시아에 비해 턱없이 작아 미국 핵우산을 벗어 던지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나토 유럽 회원국에 배치된 미국의 전술핵 통제권을 미국 대통령이 쥐고 있는 것도 족쇄다. 유럽이 무기 재가동을 시작했지만 국가별로 파편화돼 있고, 규격도 달라 경쟁력이 떨어지고 공동 조달도 어려운 형편이다.
반대로 트럼프에 대한 유럽의 불만도 많다. 그린란드 매입 또는 영토화 일방 선언은 유럽의 다자 협력주의를 무시하는 것이란 인식이다. 나토는 유럽 안보뿐만 아니라 미국의 전략적 필요성 때문에 결성된 가치 동맹체인데 트럼프는 이를 기업 간 거래 계약처럼 계산적으로만 여긴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전 종전 협상을 러시아에 유리한 방향으로 압박하는 것은 침략자에게 보상을 주는 행위로 본다. 트럼프 2기 우크라이나 지원은 대폭 줄어든 마당이다. ‘유럽의 트럼프’로 불리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도 밀착하면서 EU와 사사건건 부딪힌 오르반 빅토르 헝가리 총리를 공개 지지한 것은 주권 침해를 넘어 가치 동맹을 허무는 행위라는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이란 전쟁 뒤 ‘77년 대서양 동맹’ 관계는 새롭게 정립될 전망이다. 불협화음은 예견된 것 같다. 다만 쉽사리 이혼으로 갈 것 같지는 않다. ‘CRINK(중국·러시아·이란·북한)’ 연대가 노골화하는 판에 트럼프로선 우군을 잃는 완전 결별보다는 전쟁 비용을 어떤 형식으로든 유럽에도 떠넘기는 선에 그칠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유럽은 반발하겠지만 이혼해 ‘홀로 서기’에는 자신감이 없는 처지다. 다만 트럼프 이후 누가 집권하느냐에 따라 양측 관계가 또 어떻게 달라질지 두고 볼 일이다.
홍영식 전 한국경제 논설위원·전 한경비즈니스 대기자